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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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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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0월 2일            아브라함의 품속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누가복음  16 : 19 - 31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기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관계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행복한 삶을 원할 것입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은 무엇보다도 삶 속에 평안함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락(安樂)함이라고 말합니다. 평안할 안(安)에 즐거울 낙(樂)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평안함과 기쁨을 누리려고 열심히 찾아 안락함에 몰두합니다. 물질, 명예 그리고 권력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추구해갔지만 결국에는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거나 사라져 버립니다. 열심히 해서 얻었지만 지키는데 몰두하며 그 행복은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방법을 추구하다가 그 방법에 몰두하면서 결국에는 행복하고 자 하는 이유나 목적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영원히 누릴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슬픔과 고통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인의 모습 속에도 있게 됩니다. 즉 위선적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적 가치관으로 추구하는 행복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신앙을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에 항상 불안과 불만을 가지고 분노합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나누지 못하기에 그로 인해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재물욕으로 인해 참된 진리에 눈이 어두운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비유로 든 것입니다. 한 부자는 그 시절에 왕이나 귀족들만 입을 수 있는 값비싼 자색 옷을, 귀한 속옷인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쾌락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로 헌데 투성이어서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음에도 불구하고 연민의 정은 하나도 없고 자기 쾌락에만 전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쾌락을 즐기던 부자도 남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거지도 이 세상 마지막 순간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영원한 세계에서는 서로의 상태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안에 있는 거지였던 나사로,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는 부자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안에 비유한 이유가 무엇일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품 안, 아브라함의 품 안은 평안함과 안락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을 닮아가는 삶, 천국을 미리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진정한 신앙인의 삶을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 삶입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믿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평안과 기쁨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나누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과 가족의 삶을 맡긴 곳은 세상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의지하고 맡기며 나아간 곳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욕심에서 벗어남으로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세상적인 가치관을 상징하는 부에 맡긴 인생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기 어려움 특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부자가 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질 사용 즉 구제해야 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부자는 재물을 자기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가 쉽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도 쉽게 됩니다. 재물로 다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 잡혀 그 재물이 자기 자신인 줄 착각하며 재물로 군림하려 들게 되기 쉽습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잠 10:15) 그러므로 부자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인생의 절대적 의지처는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중심의 왕좌에는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가치를 믿는 나, 아니면 하나님을 믿느냐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갈 때에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그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성취되어 누리며 나누게 됩니다. 신앙인이 환경과 조건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면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나오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 안에 있을 때에 오늘의 삶의 고난 속에 소망의 능력으로 인내하며 승리하게 됩니다. 미래에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 고난이 소망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알고 믿음으로 미리 누림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값비싼 겉옷을 입고, 귀한 속옷을 입으며, 매일 집 대문 앞에 있던 온갖 헐어 있고 굶주린 거지 나사로를 외면하며 날마다 연락을 즐기던 부자는 잠시 쾌락을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부러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고통 속에 있게 됨, 즉 소망이 없는 지옥에 있게 됩니다.

‘코피노’, ‘라이 따이한’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군인과 기술자들이 베트남에 파병되고 일하다가 생긴 한국 아빠와 베트남 엄마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라이 따이한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월남 패전 후에 적국의 아이들로 배움의 기회도 없이 차별의 대상이 되었기에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유학생과 관광객들이 필리핀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코피노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인들의 임신과 동시에 한국 아빠들이 버리고 도망가서 연락을 끊는 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잠시의 쾌락을 위해서 자기 자신과 한 여인과 그 가족, 그리고 태어난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소망이 없는 곳에는 본능적인 쾌락으로 행복을 누리려하다가 영원한 불행에 빠지게 되는 예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라이 따이한이나 코피노들을 도와 소망을 주기 위해 믿음과 직업 훈련을 통해 미래를 개척해 주기 위해 애를 쓰는 목회자와 많은 신앙인들이 현지에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소망가운데 나아갑니다. 바로 이러한 삶 속에서 인내와 소망가운데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소망이 있는 자가 누리는 행복은 고난가운데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감옥에서 찬양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소망을 가집니다. 바로 이 비밀을 아는 신앙인이기에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다가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라함은 75세에 떠나라 하니 떠납니다. 재산이 많아져 우물문제로 다툼이 일어나자 조카 롯에게 먼저 정하라고 하는 여유가 있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다 자란 약속으로 주신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니 바칩니다. 부자들이 재물을 섬길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녀에 매여 있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유,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다가와 이런 질문을 함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이 관리는 부자였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라로 스스로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2,23)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관리의 신앙은 물질이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물질이 될 때에 율법 지키는 것도 물질을 위한 것이 됩니다.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일 때만이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평안과 즐거움은 살아가기 위해 부르심을 받을 사람들이 바로 성도인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확신 속에 약속 가운데 소망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며 아브라함의 품에 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의 거하는 사람입니다. 주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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