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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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 4일            토기장이 손 안에 있는 진흙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예례미야  18 : 1 - 11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8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노동시간 제한을 주장하며 미시건 거리에서 파업 집회를 열었던 것이 시작입니다. 그래서 노동절을 메이데이라고 부르다가 사회주의 냄새를 풍긴다고 하여 9월 첫 번째 월요일로 지정하여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노동자의 권익만을 강조하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보니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회사들은 제 3세계로 회사와 공장을 옮김으로 일자리를 잃어가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위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해로움이 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함께하며 공동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회하는 말을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왜 나한테 찾아오지 않았어”등 이웃이 안타까워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착각하며 살아갔기에 후회하는 말들입니다. 인도자를 잘못 선정해서 엉뚱한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 후회합니다. 맡기는 데가 잘못 됨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감에 싸이게 되어 후회합니다. 달콤한 감언이설에 속아서 헛된 빈 열매들만을 만든 인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은 성취를 해도 성취감을 모르고, 은혜를 받으면서도 은혜의 고마움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대부분은 감사가 없는 생활을 합니다. 평안이 없는 생활을 합니다. 기쁨이 없는 생활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삶을 살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불평과 불만과 불안 속에서 위선된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전에서 제사도 드리면서 이방신도 섬기고,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게 되는 백성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유다의 범죄에 대한 심판을 예레미야를 통해 경고하시는 내용입니다. 12편의 설교를 통한 경고 중 8번째 설교입니다. 이는 그 유명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입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구약과 신약에 본문 말고도 한 번씩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피조물이심을 강조하시는 내용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1-23) 하나님만이 절대 주권적 선택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대속의 사랑으로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 손 안에 있는 진흙의 비밀을 아는 삶은 진정한 삶의 보람과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풍성히 누리면서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를 성숙한 신앙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게 해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을 깨어서 녹여 다른 그릇으로 만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변화되는 모습을 비유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토기장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진흙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인간과 피조물입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진흙이 그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의 손이 그릇을 만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토기장이의 손은 하나님의 주관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소유주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대상이 피조물이며 피조물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자기 자신의 마음대로 자기 자신이 주인으로, 자기 자신이 소유하는 사람으로 여기며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유다 백성은 최소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자신들의 마음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우습게 여깁니다. 알면서도 ‘설마’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여깁니다. 자기 자신이 토기장이인 줄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진흙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인생은 토기장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을 길러도 인생은 토기장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재물을 쌓아도 인생은 토기장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주관하시는 것이지 인생이 하나님을 주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절)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생임을 아는 자는 삶에 여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여유는 삶에 누림과 나눔을 가지며 살아가게 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그 인물의 대표적인 예는 욥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욥은 여유를 가집니다. 7남 3녀인 열 자녀들을 몽땅 잃어버리고, 하인들도 잃어버리며 그리고 수많은 재산인 가축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불의와 부정직 그리고 불경한 삶을 살아갔다면 죄의 값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녀들까지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경건한 신앙생활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 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친 고난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평범한 신앙인이라면 원망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태어날 때에 맨몸에 빈손으로 남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살아가면서도 보이게 보이지 않게 이웃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며 존재합니다. 죽을 때에 맨몸으로 다 남겨두고 남의 도움으로 묻히고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수술을 위해 수술실에 들어가면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계수하신 날이 오늘이라면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를 알 때에 인간으로서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힘이 고난을 이겨나가게 합니다.

2.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기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6절) 자기 자신이 하나님임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선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 능력을 무시하며 의심하느냐 라는 질문이십니다. 오늘날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질문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인생을 의지하려하고 자기 능력과 지식을 믿으려하며 나를 외면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들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맡기는 사람들은 여유가 생깁니다. 아무리 죽음의 순간이라도 배짱의 여유,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경외하는 곳에 담대함이 생깁니다. 순교자들이 죽음의 순간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비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날아오는 돌을 맞으면서도 용서할 수 있었던 스데반 집사의 여유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바치기 위해 결박하며 칼을 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피조물인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영생의 약속, 천국의 소망을 가질 때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며 담대하고 여유있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해야 합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4절)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믿고 맡기는 곳에는 하나님의 의견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지혜입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의 예를 들어봅니다. 산 날보다도 살아갈 날이 많은 다니엘의 젊은 친구들입니다. 맹렬히 타는 풀무 불을 앞에 선 이유가 있습니다. 왕의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인한 죽음 앞에 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공포에도 담대합니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담대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특권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며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돌이키라” 유다백성들이 돌이키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재앙에 대한 뜻을 돌이키겠고, 악한 것을 행하며 청종하지 아니하면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신다는 의미입니다. 돌이키는 자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돌이키시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진노의 진흙 그릇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긍휼의 진흙 그릇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나누는 비결입니다. 돌이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늦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에 적용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토기장이가 아니라 토기장이 손 안에 있는 진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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