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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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5월 15일            대화의 소통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창세기  11 : 1 - 9
오늘은 성령강림주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순종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120명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을 기념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 성령의 강림을 통한 성령의 임재의 열매는 복음의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죽을까 무서워서 집 안에 숨어있던 제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밖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역사, 즉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로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즉 언어가 다르지만 하나가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오늘 본문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노아의 홍수로 물의 심판을 받은 인생이었는데, 다시 번성하며 안정되어 살만하게 될 때에 다시 죄를 짓게 됩니다. 바벨탑사건입니다. 혼란이라는 뜻을 가진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함으로 언어의 혼란이 온 사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혼란한 대화로 인하여 소통을 하지 못함으로 오해와 편견 그리고 다툼과 분쟁으로 불안하고 불만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전해지는 이야기가 다른 이유, 같은 말을 하였는데, 해석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요즘 흔히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소통이라고 합니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불통이라고 말합니다.

대화의 소통! 대화의 소통은 먼저 불통의 원인과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대화가 소통이 되어야 인간에게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이러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삶은 대화의 소통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대화의 소통을 통하여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회개하는 자만이 진정한 대화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언어의 뜻을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어가 다름으로 인하여 아예 알지를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합니다. 물론 사랑 안에서 전혀 언어가 다르지만 느낌과 표현을 알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어느 한계에서만 가능합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안다 하더라도 그 진의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에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간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하나님과 소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회개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민생활에서 이렇게 쉽지 않음을 제대로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후에 미국에 와서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다닌 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영문학 교수가 된 분의 고백입니다.

“사실 영어로 쓴 시를 강의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워서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아는 척하며 가르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할머니 무릎에서 배운 영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대화도 소통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하나님과 대화의 소통은 더욱 더 어렵습니다. 아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며 막연한 대화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과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오늘 자기 자신을 있게 하신 그 분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면 그 분이 주신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알려주셔야 할 수 있음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힘으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알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제대로 된 보람과 의미를 가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무엇을 잘못했고,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디에 있는 지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 듣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만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과 이웃과의 제대로 된 소통의 시작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담대하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이유입니다.

2. 겸손한 자만이 대화의 소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간을 태어나면서 누구나 다 자기 보호 본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 하기에 핑계와 변명 그리고 책임을 전가하며 자기 합리화의 훈련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본능적 경험과 보이지 않는 훈련은 교만해져 가게 만듭니다. 부분적이며 지엽적인 일을 전체적이며 근본적인 일로 만들어갑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오늘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오만과 허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속성은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인기와 명예 그리고 자랑을 통해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추구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됨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며 불순종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갈등과 불화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오늘 바벨탑을 쌓아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하는 시도의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 인간은 누구나 다 이름을 내기 위해 살아갑니다. 명성을 쌓기 위해 하나님에게 도전해 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내기 위함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의 이름을 내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알아주면 좋기에, 오늘도 우리들은 모두가 똑똑함을 보여주려고 주장을 피게 됩니다.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세력을 모으기도 합니다. 존귀함을 보여주려고 무시를 당하면 참지를 못하기도 합니다. 인기만을 추구하는 살아갑니다. 체면을 위해 살아갑니다. 조금만 인기가 있으면 자기 착각 속에 절대화 시켜가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와 여러분들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웃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대화를 못하기에 세월을 허송하고, 이웃 간의 다툼과 분쟁 속에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나 이외에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니, 우습게보며 대화를 나누기에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기에 자기 합리화 속에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알게 됩니다.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 바벨탑을 쌓게 합니다.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님은 흩어져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관리해야 하는 데 자기중심이 되면 자기 자신과 소통하지 못함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착각, 자기 자신의 꾸밈으로 위선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관리하며 꾸미다가 보니 자기 자신이 자신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영원할 것 같아 영원히 소유할 것 같아, 물질이나 자녀를 놓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소통하지 못함으로 헛된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월을 낭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아는 자는 겸손해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심령 깊은 곳에 또 다른 자기 자신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겉 사람은 꾸며진 자기 자신이라면 속사람은 실체의 자기 자신입니다. 그 속사람은 타락해 있는 죄 덩어리인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들이 보는 겉 사람에게만 관심 있는 사람들은 속사람이 썩어져가고 있음을 모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던 인생이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께 맡기는 이유입니다. 결국에 보람된 인생은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고 겸손한 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삶입니다.

3. 살피는 삶이 대화의 소통을 가져옵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가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7절) 인간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바벨탑을 쌓음으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흩어지게 하셨기에 그 혼잡한 언어를 소통하며 흩어짐 가운데 하나가 되려면 주의하며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조심하며 살피게 됩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조심하며 살피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해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면 이웃을 주의하며 살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이웃 아래에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에 주의 깊게 살피게 됩니다. 이웃은 자기 자신과의 다릅니다. 이웃은 하나님이 주신 용모, 성격, 은사 등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같습니다. 이웃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다른지, 무엇이 특별한지를 알려면 주의 깊게 살펴야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맞다, 옳다 하던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살핍니다. 이해하고 살필 때에 제대로 소통하게 됩니다. 이 마음을 주시는 유일한 길이 성령의 임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는 곳이 성령의 임재입니다. 오늘 성령 강림을 통한 성령의 내재하심이 제자들의 삶을 바꿈 유월절에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제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길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파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 때에 이웃의 다름의 존귀함을 주의하며 살핌으로 알게 됨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대화의 소통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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