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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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4월 24일            예수님의 제자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요한복음  13 : 31 - 35
사랑하라”( 지난 주간 화요일에 “진정한 리더쉽은 위기에 빛난다”라는 책을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2년 전에 저희 교회 여름수련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신 정인수 목사님이 쓰신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일 새벽에 정인수목사님은 향년 61세로 하나님이 부르셔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정인수 목사님께서 소천하시기 전에 책들을 교회를 통해 배송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 책을 펼치면서 관속에 누워있을 고 정인수 목사님인 저자를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 모습, 라과디아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서로 격려하던 모습이 새롭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자기 자신의 하늘나라 가실 것임을 모르고 보낸 책입니다. 천국으로 떠나면서 마지막 선물을 보내신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는 수요일 오전에 그 교회와 유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며 지냅니다. 그 책은 현대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지를 쓴 책입니다.

“왜 저자를 비롯하여 이구동성으로 현대 교회, 특히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말하는 가?” 신학교 다닐 때에 선교학 교수님이 한창 세계 교계에서 선망이 대상이 된 한국 교회에 대하여 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하셨던 조언이 생각납니다. “태준! 한국 교회의 모습은 80년 전에 미국과 영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럴 때에 미국과 영국 교회를 비롯하여 유럽교회들이 쇠퇴한 이유를 연구해서 한국교회도 그 길을 가지 않도록 해보라”는 충고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머리로, 이론적으로, 아니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은혜와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하면서도 삶 속에서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나누는 교회가 위기라고 말하는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사랑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그런 후에 예수님을 팔자가 누구신지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에게 적신 빵 한 조각을 주시며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자 가룟 유다는 그 방을 나갑니다. 그런 후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아는 일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은 어떠한 삶인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31-33절)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이상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광이 아닌 수모와 조롱을 당하러 가셔야 함에도 인자가 영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의 눈에는 승리가 아닌 실패, 생명이 아닌 죽음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존귀와 영광이 아닌 비참과 저주임에도 불구하고 승리와 영광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할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길을 가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를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길이 영광의 길임을 알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다 이룬 길이기에 십자가에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안에 가득 차있던 제자들이 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출세를 꿈꾸던 제자들이 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미성숙한 신앙인, 미성숙한 제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의 미성숙을 알고 계셨기에 작은 자들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알고 계시기에 그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큰소리치는 베드로가 세 번 자기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작은 자는 영적인 미성숙을 의미합니다. 어린 믿음의 상태는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보다는 무엇을 달라고 보채는 신앙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경험하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았다고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자기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2절)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순종을 통하며 자기 자신이 영광을 받으면서 그 후에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만이 해주실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는 영광을 받으심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자기 자신이나 세상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2. 지속적인 사랑을 하는 삶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35절) ‘사랑하면’의 에게테라는 단어는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 새 계명의 의미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못 쓰지 않게 되는 형식이나 질 면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계명, 지속적인 계명인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계명은 지속적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알지만 인간의 한계가 사랑을 멈추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이 원하는 사랑을 한다면 조건적인 사랑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에는 사랑이 미움과 증오로 변하기도 하고 사랑의 대가가 오지 않을 때에 섭섭함이 몰려오는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이기적인 사랑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이런 말일 것입니다. 병간호하다가 자기 자신이 지치면 부모도 돌아가시기를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게 됨은 이런 인간의 한계를 말합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안간다”는 말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잘 보일 정승이 없으니 정승이 죽어도 가 볼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잘 보이는 것은 정승 자신이 아니라 정승이라는 자리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을 바꿔야 하고, 의미와 목적을 바꿔야 하고 본질을 바꿔야 합니다. 원하는 것이 바뀌어야 하고, 근원이 바뀌어야 하며 연결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와 목적, 본질 그리고 연결의 근원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저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행하여야 합니다. 트레드릭 스판하임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는 가장 많이 아는 자가 아니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이다”

3.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교만과 자학이 같은 자존심이라고 합니다. 능력이 있는 자존심이 교만, 능력이 없는 자존심이 자학을 말합니다. 자존심은 극한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와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만의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러 가는 그 길입니다. 그 율법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랑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책임전가의 사랑이 아닌 자기 책임의 사랑, 즉 대속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를 바라보며, 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용서와 용납, 화해와 소망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들에게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 같이 용서의 은총을 받은 은혜를 누리며 은혜의 빚진 자로서 은혜를 베푸는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즉 삶 속에서 복음을 누리며 복음을 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 누리기 위해 함께 모입니다.

사역자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제도의 제자, 교회의 제자, 프로그램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십시오. 지속적인 사랑을 나누십시오.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부인하고 자기희생의 사랑을 통해 주님을 따라가십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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