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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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4월 10일            두려워 아무 말 못한 사건
  설교 :     이연길 목사 [전 달라스 빛내리교회 담임목사]
  본문 :     요한복음  20 : 19 - 31
4월 8일(금) 저녁집회 ‘하늘이 찢어지다’ (막 1:9-15)

복음서는 쓴 저자에게 각각의 대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 예수님의 신들매도 맬 수 없는 선지자에 불과하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마가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운명하시자 그 앞장섰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늘이 갈라짐’은 ‘찢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찢어짐은 닫힘과 같이 다시 열림이 아니라 소통을 의미합니다. 성막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성소에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라는 말은 성령이 비둘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같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같이’라는 성령이 위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동등 된 위치에서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성부의 소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심을 의미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 1:40,41)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기에 예수님의 뜻에 맡깁니다. ‘원하시면’ 그리고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을 통해서 문둥병이 낳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쌍히 여김은 애간장이 끊어질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김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막힌 하늘이 찢어짐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곳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까?

9일(토) 새벽집회 ‘그 분의 관심’ (막 1:35-39)

현대교회는 예배의 감격이 없어진 세대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심사가 다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은 모든 사람이 주를 찾음을 알려줍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주는 인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찾는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셔서 전도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제자들을 배를 태워 보내신 후에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막 6:48) 즉 물위로 걸어서 배를 지나가려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은 기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선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하여 주신 은혜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의논하며 이를 위한 필요의 간구를 통하여 경험해 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순종을 통해 경험하는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9일(토) 오전집회 ‘하나님의 마음과 문화의 충돌’ (막 2:13-8:26)

사도행전을 역사적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역사 속에 신학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피는 꽃은 가시가 있는 꽃입니다. 같은 종류의 꽃도 사막에서는 가시가 있습니다. 사막의 야자수는 뿌리가 5,000개가 나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길기에 마가복음 4:1-9절의 씨 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씨입니다. 씨는 천국의 말씀, 비밀, 법 즉 성경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길가 밭은 서기관. 돌짝밭은 제자들, 가시떨기는 갈릴리 민초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옥토는 몇 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 옥토의 예는 나병환자,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혈루증을 앓는 여인, 백부장, 수가성여인 등이 있습니다. 옥토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사실 거지같은 마음입니다. 신기하게도 옥토는 회당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으로 법을 다룹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살리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율법을 해석할 때에 유대인은 죽이려고 법을 해석하고, 예수님을 살리려는 법으로 해석합니다. 중요한 율법은 안식일법과 성결법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아시기에 쉼과 하나님과의 사귐의 필요함을 아시고 주신 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성결법은 인간의 건강에 필요한 법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임재한 사람의 순종 즉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단할 수 있도록 기도와 행위 즉 순종이 필요합니다.

9일(토) 저녁집회 ‘쉽게 이해 될 수 없는 분’ (막 8:27-38)

성경에도 드라마와 같이 세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서기관, 제자, 민초(백성) 그리고 믿는 자를 중심으로 하는 세팅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 세팅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의 고백과 백부장의 고백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항변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문의는 사실 죽음을 각오한 답변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가이사랴 황제의 이름을 붙인 도시는 황제의 이름에 걸 맞는 발달된 도시이며,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신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세상 적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이 잡히셔서 위 뜰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아래 뜰에서 불을 쬐며 대제사장의 여종의 예수님과의 연관성을 물을 때에 저주와 맹세를 통한 부인을 합니다. 위 뜰과 아래 뜰을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며 불을 쬐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죄를 지은 베드로를 예수님·은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 8:11) 정죄하지 않음은 도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제도가 바뀌고, 제도가 바뀌어야 사회가 바뀝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 말씀하셨던 이유는 자기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 “두려워 아무 말 못한 사건'으로” (막 16:1-11)

성경을 책 중에 책, 문학 중에 문학이라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깨달음을 가지고 성령의 만남을 통하여 세미한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할 때입니다. 먼저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지,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읽는 것은 머리에 남지만 묵상이 없으면 바로 사라지게 됩니다. 읽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을 통하여 마가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림의 종편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밤잠을 자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갑니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은 장정 10명이상이 들어야 옮길 수 있으며 인봉되어져 있기에 허락이 없이는 돌을 옮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니 세마포가 놓여있습니다. 만일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면 시신을 싼 세마포가 그렇게 가지런히 놓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들이 부활을 믿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빈 무덤이나 세마포 머리의 두건, 옮겨진 돌을 부활의 증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때까지 보존되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증거는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만난 주님을 통한 자기 자신의 삶이 부활의 증거인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함의 감격, 영광 그리고 즐거움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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