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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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27일            Celebrating Death Destroyed
  설교 :     서용정 목사
  본문 :     고린도전서  15 : 19 - 26
다른 사람 때문에 야단맞은 적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못했지만 내가 벌을 받았다면, 제 생각엔 대부분 사람들은 불공평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폭탄을 속옷 안에 또는 신발 속에 숨겨서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공항보안검색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것이 공평한가요? 자녀들 중 한 명이 잘못해서 부모님이 모든 자녀를 야단치는 것이 공평할까요? 우리는 아마 양쪽 편에 서서 토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 한 인간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고통을 받는 것이 공평한가요? 우리는 양쪽 편에 서서 논쟁을 할 수 도 있겠지만 사도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논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답은 단순히 “그렇습니다” 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아담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한 것은 모든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왔고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모두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우리가 뉴스를 읽는다면 인간의 본능엔 죄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한국은 끊임없이 핵전쟁의 위협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는 브뤼셀에서 두 자폭테러로 인해 31명이 사망하고 300명이 다쳤습니다. 2주 전에는 터키 앙카라에서 자동차폭탄 테러로 인해 37명이 사망하고 100명이상의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제 생각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마음이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 절대 저런 일은 하지 않아” 라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난주일 우리예배가 끝나고 다과를 나누고 있었을 그 시간쯤, 켄터키 루이스빌에서 아빠가 침대에서 자고 있는 다섯 살과 세 살 된 자녀들과 지하실에 있던 아내를 총으로 쏘고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신을 쐈습니다. 또 다시 우리는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생각 할 것입니다; “ 난 절대로 저런 짓을 하지 않아”

진짜로 그럴까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을까요? 북한의 김정은, 자살폭탄테러범들 아니면 그 켄터키 사람이 어릴 적부터 “ 난 앞으로 커서 내가 할수 있는 만큼 사람에게 많은 아픔과 공포를 느끼게 하고 싶어” 라고 결정했을까요?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에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면 저는 그 말을 믿을 것입니다. 만약에 악을 행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저는 그 말을 믿을 것입니다. 그 말들을 믿겠지만, 저와 여러분들 또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믿습니다.

인류에게 미치는 아담의 영향력에 대한 유태인들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인임으로 죽음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향해, 사도 바울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한 인간, 아담으로 인해 인류가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한 인간, 예수님 안에서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한 사람이 그토록 큰 피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계속 생각하며 이것을 “불공평” 하다고 말합니다. 더더욱 믿기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며 이것을 “너무 단순” 하다고 말합니다. 아담을 통해서 죽음이 왔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은 너무 불공평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 정도로 단순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복음(기쁜소식)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봅시다. 아담을 통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몇몇 분들은 죽음이 그저 삶의 일부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평안하게 침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려싸여 죽음을 맞이한다면 죽음은 거의 낭만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자폭테러로 인해, 총기난사로 인해 일찍 떠난 생명들은 어떻습니까? 만약 죽음이 그저 삶의 일부라면, 왜 평화로운 죽음에 비해서 끔찍한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다를까요?

죽음이 왜 그렇게 두려운 일일까요? 저는 죽음을 두려운 이유가 우리에게 상실감을 남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생명을 앗아갈 때 그 사람의 인간관계들을 가져가 버립니다. 그 사람의 미래의 가능성을 가져가 버립니다. 이런 것들을 평생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두려운 생각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과 함께 이야기 할 수도 웃을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어떤 일을 성취해 내었을지도 우리는 절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부활절에 대해서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1.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22,26절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활절의 복음은 우리가 죽더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믿는 자(크리스천)에게 얼마나 큰일을 행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가장 무서운 것들, 죽음의 두려움을 가져가셨습니다.

가끔 여러 생각을 자유롭게 하다보면, 사망의 권세가 슈퍼악당이고 예수님이 슈퍼히어로인것을 상상합니다. 그들은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돌아다니며 자신의 슈퍼파워인 생명을 앗아가는 힘을 행사하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슈퍼파워인 생명을 주는 능력을 쓰십니다. 우스운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의 권세가 돌아다니며 죽이면, 예수님께서 돌아다니시면서 생명을 다시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권세가 더 강할까요? 죽어! 살아나라! 죽어! 살아나라! 이것이 평생 갈 수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드디어 예수님을 죽입니다. 하지만 사망의 권세는 예수님을 계속 죽음의 상태로 내버려두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더 강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이야기함은, 예수님이 사망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을 알면 좋지만, 지난 한 주 동안에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보다 더 강하지만 가끔은 사망의 권세가 이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보다 더 강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마지막으로 완전 멸망시키실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의 메시지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다시 살아 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가 사실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초대 교회에서의 세례는 물가에서, 강이나 호수같은 곳에서 이루어 졌었습니다. 세례자는 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이 물 밖으로 다시 나오는 것이 부활, 예수님 안에서의 새 삶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축하하는 것은 죽음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죽음을 축하하는 이유는 죽음은 한번 있지만 삶은 두 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삶은 끝이 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영생의 삶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사망의 권세는 예수님을 통해 얻은 삶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영생 앞에서는 나약합니다. 이것은 두번째 포인트로 이어집니다.

2.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19절

사도바울은 크리스천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지금 이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의 삶이 이것뿐이 아닙니다. 만약이 지금 이 삶이 이것이 다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사도바울은 주장합니다.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왜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해서 살겠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소중합니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의 인생을 너무 가까이 붙잡고 있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이 삶이 전부라면 죽음은 참으로 너무나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 폭탄이 터져서, 총기 난사가 일어나서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병이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지금의 삶이 전부라면, 죽음은 우리가 모아둔 전 재산, 우리가 받은 교육, 학위, 우리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든 명예와 권력이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삶의 적인 것입니다. 죽음은 소중하고 좋은 것을 멈춥니다. 소중하고 좋은 것이 멈출 때 우리는 속상해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기회를 빼앗아 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을 그의 부활을 통해 되돌려 놓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동행하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함께 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천 년 전에 제자들이 빈 무덤을 봤을 때 세상과 이 좋은 소식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뉴스에서 보는 어떤 모습의 죽음이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보다 더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뒷부분, 55-5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주의 부활을 축하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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