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  처음으로
   †  교회안내
   †  예배안내
   †  교회약도
     환영의글
   †  교역자소개
     교회연혁
     교회행사
     교회조직
     선교활동
     주일설교
     주간소식
   †  특별집회
   †  예식안내
   †  영어예배
   †  미국장로교
 문자설교                                                
  2016년 3월 20일            침묵할 수 없는 영광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누가복음  9 : 28 - 40
목회자로서 임종 시, 은퇴 시에 많은 고백을 듣게 됩니다. 오래 전에 임종을 앞둔 분이 목회자를 찾는다고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서 보니 낯익은 얼굴입니다. 고국에 있을 때에 저도 알고 있었던 알려진 분입니다. 그분이 숨이 가쁜 가운데 고백함이 실감이 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추구하던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뒤늦게 주님을 알게 되어 보람되었던 삶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기도를 부탁합니다. 목사님들의 은퇴의 고백에도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며 고백하게 됩니다. 왜 신앙인이라면서 뒤늦게 후회를 하며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며 은혜를 고백할까? 믿음은 미리 누리는 것인데, 왜 오늘의 삶에서는 그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까?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감람산 동편의 벳바게와 나사로를 살리셨던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두 제자에게 마을에 들어가서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가져오라고 합니다. 주인이 이유를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며 가져오라 하신 것입니다. 이에 두 제자는 실제로 이를 경험하고, 다른 제자들은 두 제자의 간증을 통한 간접 경험과 나귀 새끼를 보는 직접 경험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들의 겉옷으로 안장을 만들어 예수님을 태우고 겉옷을 길에 펴며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그런데 제자의 온 무리가 찬양할 때에 어떤 바리새인은 예수님에게 책망하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침묵할 수 없는 영광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이 살아가야할 삶을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30, 31절) 하나님을 경험하며 침묵할 수 없는 영광을 경험하며 찬양하는 삶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제자들의 무리가 침묵할 수 없이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라”, “주가 쓰시겠다 말하라” 하나님은 모든 시작을 말씀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이에 대한 영광은 “이르시되”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시작도 말씀하심으로 시작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모든 하나님의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아니하는 신앙인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의 성숙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에서 성숙되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에는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과 구원, 공의와 사랑, 율법과 복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세월이나 일을 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에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29-31절)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온 무리의 제자들 가운데 제자 둘을 택하여 보냅니다. 제자 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제자들처럼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사역임에 동시에 우리들이 직접 경험하며, 온 무리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통해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호산나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실 때에 침묵할 수 없는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두 제자들의 자기 자신들에게 지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 지라”(32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 순종하는 곳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아니면 듣더라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맛을 보거나 멋을 누리게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경험하며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합니다. 자기 자신의 직장과 임지, 자기 자신이나 자녀들의 배우자, 미래에 나갈 바를 알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간절한 간구를 통해 알게 될 때에 그 경험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됩니다. 아니면 소리를 지르면서 감사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3.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행한 침묵할 수 없는 영광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하나님을 찬양을 하면서도 찬양하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음미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나귀 새끼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는 예수님의 예지적인 능력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구세주 예수님께서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구원자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로마 식민지에서 구원해줄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잘못된 깨달음은 이단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잘못된 깨달음은 신앙교만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자기 자신이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나중에 그 예루살렘의 입성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먼 훗날에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삶의 방법으로 삼아 그 기쁨으로 찬양을 하다가 신앙의 성숙으로 하나님의 사용됨의 기쁨을 누리면서 진정한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찬양하는 비밀을 알고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비밀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며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공의를 완성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원을 베푸신 죽기까지 겸손하신 그 사랑을 알 때에 돌들도 침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을 때의 흥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임재하신 그 손길을 발견할 때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좋아하고 사모하던 연예인이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는 고백을 받았을 때의 경험일 것입니다. 존경하는 스승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에, 자기 자신이 존경하는 분이 자기 자신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소리 없이 해결해 주었음을 알 때에 그 사랑의 경험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영생의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을 때에 예수님을 위해 죽기 위해 거리로 나가 영생의 비밀을 외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 자기 의를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을 때에 예수님을 위해 죽기로 다짐하며 영생의 비밀을 외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오늘 성만찬을 나누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려고 자기 자신과 선한 싸움을 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삶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찬양을 하며 즐길 것입니다.



© 2004-2016   kpcow.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