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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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13일            달려갈 길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빌립보서  3 : 4 - 14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인생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달려가는 선수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면 과연 어디로,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잘못 된 길을 가고 있다면 제대로 된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잘못 된 길을 가면 헛수고를 하게 됩니다. 제대로 된 길은 생명을 얻는 길이어야 하고, 달려가면서 생명력을 얻는 길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영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사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잘못된 자신의 길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훌륭한 신앙인 같아보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루어내는 것에 도취되어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율법의 의’ 가운데 악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간 과거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집안 배경이나 사회적 위치 그리고 자기 자신이 과거의 배경 모두가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며 정통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할례도 받았고, 사울 왕의 핏줄을 받은 베냐민 지파에, 대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율법에 박학다식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제대로 자기 자신의 길을 달려가는 것 같았지만, 예수님과 만난 후에 그 길이 잘못된 길임을 알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에 거짓 교사들에 의해 속아서 제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적 율법주의로 인해 복음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길을 가게 하는 무리들이 침투하여 복음으로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믿음의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교인들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도 개종한 이방인이 아닌 정통 유대인임을 말한 후에 그 길을 가지 아니하는 이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달려가야 할 길을 알려줍니다.

1. 먼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절) 그리스도인의 푯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궁극에 누릴 것 즉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인 영생 즉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을 바라보는 것, 위엣 것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에 오늘의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이 세상인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론 이 목적은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보여 지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섭리를 따라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자기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 볼 때에 알게 되는 대속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로 말미암은 용서의 은총을 통한 죄 사함입니다. 구원과 영생, 죽음의 대속을 통한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변화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됨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율법적 흠이 없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 자신의 실체 즉 죄로 말미암아 율법을 스스로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대속 즉 자기 자신의 죽음과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 안에 거할 때에 구원에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난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부터 난 의’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대속의 고난과 죽음의 희생으로 완성하신 그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를 통한 영생의 기쁨과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달려갈 길이 영생의 기쁨을 얻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이 중심이 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유대 주의적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거짓 교사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진 배경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는데 방해나 장애가 된다면 내려놓아야 함을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율법의 준수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이 훼손이 된다면 그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자기 자신이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자기 자신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영생인 생명의 면류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는 것에 방해나 장애가 된다면 해로 여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는 것에 방해나 장애가 된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는 것에 방해나 장애가 된다면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 추구해야할 가치가 예수님의 사랑이기에 이를 누리고 나누기 위해서 장애가 되는 것은 내려놓거나 포기해야 합니다. 풍랑이 임할 때에 아무리 귀한 짐을 싣고 가더라도 그 짐을 바다에 버림으로 살 수만 있다면 그 짐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생명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짐보다는 생명이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기에, 더 큰 가치를 알기에 짐을 버려야 합니다. 타잔이란 영화에서 악당이 숲속에 있는 보물을 가방에 가득 넣고 뒤에 짊어지고 도망을 가다가 물에 빠졌을 때에 그 가방을 놓지 않고 물에 잠겨가던 장면을 보면서 죄 많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별로 가치 없는 것에 속아서 엄청난 가치들을 잃어버립니다. 물질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리며,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세상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귀한 것들을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완벽하고 완전할 수 없다고 하시는 데도 자기 자신이 완벽하고 완전할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며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완전하지 않은 죄 많은 인생임을 인식하는 자는 이웃에게 완전을 요구하지 않으며 행위의 의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인생이 정죄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진정한 가치를 아는 자의 삶은 그 가치를 전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3.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신앙인이 아는 것은 신앙은 이 땅에서 어느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어 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들이 이미 얻은 것은 영적 신분입니다. 그러나 신분답게 살아가는 것은 얻어져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살아가면서 얻어져 가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은 얻어져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자기 자신의 받은 사람을 전함으로 얻어져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는 분명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얻어져 가야 합니다.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완성된 신앙인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신앙인이 있고 성숙한 신앙인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가만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얻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리며 성숙되어 가는 유일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 받아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0절) 즉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 부활의 권능을 경험함으로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아서 내 보내야 합니다.

함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며 나누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나, 먼 타국 땅에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나누는 것이 전도와 선교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을 바라보며 그 복음의 은혜로 자기 자신을 죽이고 희생하는 곳에서 이루어져 갑니다. 주위에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 보여주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 용서하고 품어주는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부활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그저 살아가는 생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선교부에서 준비한 선교 지들이 있을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 질문해 보십시오. 관심이 있다면 선교 지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해야 합니다.함께 모아서 보내고 나누며, 함께 그 은혜를 나눔으로 각자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마을과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절) 부름의 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달려감으로 얻어지는 영생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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