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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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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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월 24일            함께 하는 즐거움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고린도전서  12 : 12 - 31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룹니다. 일터에 일터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신앙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가하면 그 즐거움이 없이 서로 미워하며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낼 당시에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 바울, 아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파벌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제자, 설립자, 양육자 그러면 그리스도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된 것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며 함께하는 성도들을 비방하며 사랑하지 않고 있는 데에 있습니다.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려야 할 믿음의 공동체가 그 즐거움을 잃어버린 이유는 살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방법이 맞는다고 하면서 그 복음을 잃어버리거나 복음의 장애물이 되는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즐거움이 사라진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이야기하며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비밀을 본문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곳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12,13절) 함께하는 즐거움은 누구를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두에게 공통되는 한 곳을 바라볼 때에 즐거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의 공통되는 곳은 인간이나 피조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나 피조물은 각각 다릅니다. 비슷한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똑같은 공통점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피조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곳에는 나뉘게 됩니다. 파벌이 생기고, 그 파벌에 자존심이 함께 할 때에 분쟁이 생깁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상대가 누구냐, 상황과 조건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나 피조물은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빈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의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즉 보릿고개에는 살려고 애를 쓰며 죽지 않았는데 오늘날은 먹고 입고 살만한 데 극단적 행동이 심합니다. 가족을 못 믿는 시대, 부모를 못 믿는 시대가 되어 가장이 가족들을 살해하는 사례들이 빈번해집니다. 상대적 미인입니다. 예전과 오늘날의 미인 기준이 다르고, 민족이나 인종들의 미인 기준도 다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의 기준으로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각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에 가치관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좋고 나쁜 것도 달라집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장점과 단점도 달라집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능력의 유무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며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함께하는 믿음의 공동체이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같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며,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시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바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며 함께하는 성도들을 바라볼 때에 함께하는 즐거움이 다가옵니다. 같은 형제요 자매요, 같은 사랑을 받은 자이며, 같이 부름을 받아, 같이 동역자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공동의 사역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무명으로 섬기는 것이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며 은혜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아는 곳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18-20절)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 만 바라보며 성령을 쫓아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에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명이 있고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각각의 은사, 사명, 역할이 신성함을 알게 됩니다. 거룩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어느 하나만 중요하고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귀함을 알게 됩니다.

귀함은 누구에게 받은 것인가에 따라 귀함이 달라집니다. 어느 오래된 시계를 잃어버리고 한숨을 쉬면서 안타까워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아버지가 쓰시던 시계라는 것입니다. 천금을 주어도 이 시계는 바꿀 수 없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뜻할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함께하는 성도들, 함께하는 가족들,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시고 허락하신 공동체라고 생각할 때에 모든 공동체의 일원들이 존귀한 것입니다. 부모가 모든 자녀들이 귀한 것처럼, 관계에서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통해서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적 가치, 자기중심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존귀함에도 쓸데없다, 있다, 추하다, 아름답다, 약하다, 강하다, 비천하다, 귀하다고 여기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파벌의 원인입니다. 감독이 중하다, 창립자가 중하다, 양육자가 중하다는 생각에서 서로가 질시하고 비평하고 무시할 때에 즐거움이 사라진 이유가 바로 사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다름을 주신 것은 서로 돌보며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24,25절) 각각의 다름을 통하여 서로 도우면서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부르십니다. 우리교회 만큼 다름이 많은 공동체도 없을 것입니다. 언어도 영어, 한국어, 스페인어, 포르투칼어를 사용하는 회중들이 있습니다. 인종도 흑인, 백인, 황인이 있습니다. 세대도 일세, 이세, 삼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도구가 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3. 서로 붙어 있어야 즐거움이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14-16절) 함께하는 즐거움은 함께 할 때에 즐거움이 생기게 됩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붙어있어야 하고,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함께하거나 붙어있거나 연결되려면 맞춰나가야 합니다. 마치 퍼즐 조각이 분리되어 있을 때에 아름다움이 없고, 즐거움이 없지만 퍼즐 조각을 곽 앞에 있는 그림을 보며 맞춰나갈 때에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이 됩니다.

맞춰 나간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그리신 그림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몸이 되신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눔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증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을 위한 목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 이것이 바로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함께하는 사람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먼저 진정으로 연결하거나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은 살피는 사역입니다.

상처받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공평하고 공정한 가를 생각해 보며 사역해야 합니다. 인간은 존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무시당하면 힘들어 합니다. 인간은 한 지체만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으면 불공정하다고 느끼며 소외됩니다. 독불장군의 사역은 사실 본인의 영광을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리려거나, 자기 영광을 위한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살피며 나아가지 아니하면 함께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민사회 속을 살아가게 하시고, 영어권과 한국어 권, 일세와 이세와 3세가 함께하게 하시며 그것도 다른 인종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교회들과 함께하게 하여주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에 향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환경과 조건으로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리며 전하기 위해 함께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함께하는 성도들을 살피면서 함께 나아갈 때에 우리들이 전혀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비밀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삶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것, 은사도, 역할도, 모든 것을 받아드릴 때에 존귀하고 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맞추고 살피고 배려하며 상처받지 않고 공정하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자존심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유입니다. 복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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