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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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월 19일            살피며 사역하는 삶!
  설교 :     서용정 목사
  본문 :     아모스  3 : 1 - 3
2015 지난 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완전한 동행이었습니다. EM과 KM이 함께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기도와 활동) 때문에 우리 교회는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KM과 EM 에서 시무장로가 선출되었습니다. 함께 하는 여정은 분명히 아름답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일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2016년 교회 표어를 “살피며 사역하는 삶” 이라고 정한 이유입니다.

사역에 대하여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제가 믿기로는 주안점은 3가지 부제에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살피고 2) 이웃을 살피며 3) 사역을 살피는 삶. 3가지 부제를 자세히 살피기 전에, 오늘 성경본문(아모스 3장 1-3절)의 배경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그 지위를 완전히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셨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단지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려지는 것이 얼마나 특권이며 자랑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한히 감사하면서도 자만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만에 빠졌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번영 중에 아모스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존재하는 부와 힘의 격차을 보았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며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해로움을 간과하며 평상시대로 종교활동에 열중하였습니다.

즉 희생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것은 위선이었기에 그 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황을 유의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거기에서 도전받고 성장했으면 합니다.

1) 하나님을 살피고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아모스 3:2) 2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3가지를 배우려고 합니다.
  • A) 하나님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세상의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잠깐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선택한 것들 생각해 봅시다. 자동차, 옷, 전화. 학교, 배우자. 여러분은 여러분이 선택한 것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도 똑같이 하나님이 선택한 것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살갑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실하십니다.

  • B)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영적 물질적으로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가 타인을 축복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누는 대신에, 이스라엘은 그것을 껴안고 그것에만 집중했습니다. 타인을 축복하는 선택된 도구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우리가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세상은 엉망입니다. 온갖 종류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그 문제에 눈감아 버릴 때 우리 또한 실패하게 됩니다.

  • C) 하나님은 진지하십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거나 또는 꾸짖거나를 선택한다면, 나는 언제나 사랑하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선택하는 경우가 꾸짖음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방법으로서의 징계에 대한 개념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과 나누기를 기대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실패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사랑으로 우리를 징계하시고 또 우리로 그것을 알게 하셔서,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하게 하신다면 그것이 놀랄 일이겠습니까?
2) 이웃을 살피며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아모스 3:1)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 3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 A) 우리는 가족입니다. KM과 EM 이 함께하는 교회로서, 우리 공동체가 얼마나 쉽게 KM 과 EM 의 갈등으로 양극화 되기 쉬운지 알고 있습니다. 지난 수 해동안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특히 지난해는 더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취급하십니다. 살아 오면서 누가 당신을 가족보다 화나게 합니까? 누가 당신을 가족보다 상처를 줍니까? 그렇지만 또한 누가 가족보다 충실합니까? 누가 가족보다 더 당신을 포용합니까? 예외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 대답은 그 누구도 가족만큼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KM과 EM 을 한 가족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가족으로서 우리는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각각의 다른 문화와 방식이 있습니다. 한가지 가상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당근을 썰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시다. KM의 경우 모두 함께 부엌에 모여서 함께 당근을 썰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의 행동으로 생각하고 또한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EM의 경우 썰어진 당근을 구입하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들어간 돈은 부엌에서 보낼 시간을 벌어주니까 쓸만한 한 돈이고, 그 남는 시간으로 다른 식으로 사랑과 헌신의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습니까? 우리는 다릅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고, 그냥 다른 것입니다.

  • B) 우리는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하여 상대방을 비방하기는 쉽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무엇이 잘 못 되었을 경우 EM은 KM의 완고함을 비방할 수 있고, KM은 EM의 나태함을 비방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완고함의 다른 말은 신실함이고, 게으름의 다른 말은 효율 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잘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양쪽 모두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민 교회 문화에서는, 많은 가설들이 있습니다. 많이 퍼져 있는 한 가지 가설은 KM은 쇠퇴할 것이고 EM 이 물려 받을 것이다. 나는 이 가설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다른 가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KM이 잘하면 그것은 EM에게도 좋다. EM이 잘하는 경우 그것은 KM에게도 좋다. EM과 KM이 다 잘하는 경우 그 것은 KPCOW에 좋다. 우리 둘 다 책임이 있습니다.

  • C) 우리는 은혜와 이해심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으신데도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우리의 예배당을 우리 힘으로 건축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이 장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조금도 솔선한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받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지만,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주여야 합니다. 이태준 목사님은 이해심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자발적으로 상대방의 “아래에 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거의 잘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상대방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3) 사역을 살피는 삶
두 사람이 뜻이 같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아모스 3:3) 이 말씀으로부터 사역에 대하여 2가지 배울점이 있습니다.
  • A) 상대방은 사역을 보아야 합니다. 유명한 시 “발자국” 은 이런 내용입니다. 그의 좋은 시절에 모래에 찍힌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험난한 시절에는 한 짝의 발자국 만 모래에 있는 것을 본 한 사람이 예수님이에게 왜 자기가 가장 예수님을 필요로 할 때 자기를 버려 두셨는지 여쭈었습니다. “모래에 한 짝의 발자국만 있었을 때는, 내가 너를 업고 갔을 때”라고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항상 동행하며 우리를 결코 떠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 입니다. 그러나 그 시는 EM과 KM이 동행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EM 또는 KM도 상대방을 업고 갈 수 있는 예수님은 아닙니다. 두 짝의 발자국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함께 동행하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한 짝의 발자국 만을 볼 경우 우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 쪽이 다른 쪽을 버렸거나 뒤에 남겨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B) 우리는 함께 사역해야 합니다. KPCOW가 우연히 KM과 EM이 함께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입니다. 우리는 함께 하기로 동의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하기로 약속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율이 필요합니다. 기대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민감성을 증대해야 합니다. 사려감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역은 시기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홀로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1)하나님을 살피고 2) 이웃을 살피며 3) 사역을 살피는 삶을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살피며 사역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일하면서 서로를 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하는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 없으십니다. 혼자 그 일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함께 하자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장엄하고 영원한 어떤 것의 일부가 되어 갑니다. 그 일은 예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편승하기 위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 기쁨으로 그것을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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