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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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월 10일            진정한 예배자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시편  29 : 1 - 11
신앙인의 삶의 중심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예배입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은 성숙되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자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삶 자체가 예배이지만 삶 자체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삶인지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나 태도를 보면 알게 됩니다. 지난 주일 2부 예배는 사실 저는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후반부에는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길어지자 이층을 쳐다보게 되고, 회중의 반응과 태도에 집중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2시간이 다 되어 감을 인식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제 자신의 모습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1시간 이상 하는 설교에도 시간을 보지 않던 제가 저도 모르게 변한 것입니다. 매주일 2시간 이상 예배가 진행되어도 전혀 불감이었던 제가 시간에 민감해진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곳에 부임하여 처음 예배를 드렸을 때에 들은 “한기범 목사님 보다 10분 더 했다”는 말이 깊이 가슴 속에 박혀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예배시간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불만을 제기하는 성도들이나 제직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산속에서 7시간 예배를 드리는 예배의 뜨거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현대 교회에서 예배를 온전히 드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감사 예배 시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한 시가 19편에 있습니다. 시편 19편은 평화로운 자연을 바라보며 시각적으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29편은 청각적인 뇌성, 즉 우레와 같은 소리와 시각적인 번개에 맞아 불타는 광경으로 하나님의 존엄을 통하여 찬양할 것을 권면합니다.

1,2절에서 찬양을 촉구하고 3-9절에서는 찬양의 이유를 말합니다. 이로 인해 찬양하는 자가 10,11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평강의 축복을 받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 속에 인간은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실감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다윗은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고 돌리자고 말합니다. 즉 진정한 예배자가 되자고 말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어떤 예배를 드릴 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1절)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만이 경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신앙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을 알고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배 자체를 바라보거나, 예배의 형태를 바라보거나, 성가대의 찬양이 마음에 들어, 사역자를 좋아하기에, 목회자나 사역자를 믿기에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나 예배 자체나, 예배형태나, 예배의 순서나, 예배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나 믿음이나 경배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예배의 시선을 빼앗긴다면 그것은 예배의 대상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목회자가 나오면 열광을 하며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그 유명한 목회자가 세상이 비난하는 죄를 지어 감옥에 가게되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의 예배의 대상은 그 유명한 목회자였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입으로 여호와를 찬양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 목회자를 찬양했던 것입니다.

고 김영제장로님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며 배우게 됩니다. 고별 예배 시 마지막 신앙생활을 하셨던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느끼고 있었던 김장로님을 그 목사님도 똑같이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목회자가 다르지만 그 목회자를 대하는 것은 한결같으신 이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목회자는 하나님의 도구로 보아 자기 자신의 영적 지도자로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의논을 많이 하시고 그것을 존중하며 시행하시면서 그 결과를 즐기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보는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며, 그분이 함께하게 하여주신 분들이기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양육되어가는 곳,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든 교회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갈보리 언덕에 피 흘리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2절) 자기 자신에 관한 것 중에 위험한 예배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관한 감사예배입니다. 결국에는 예배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참석하는 자나, 예배의 순서 맡은 사람들, 모두가 사람 중심이 되기 쉬운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 시에 주의해야 할 것은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위험한 예배입니다.

사역자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물론 사역을 잘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역을 통해 감동을 주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자들이 겸손하며 낮아지는 이유, 은밀하게 자기 자신을 감추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도구에 불과한 데, 사용하신 분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에게 향하여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실족하거나, 이웃을 실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써왔던 맥스터가 임종 시, 친구들의 칭찬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펜이었을 뿐입니다” 영국에서 개혁 시에 청교도 혁명 의회 파에 속해 기병대를 이끌고 전쟁하여 승리한 크롬웰이 개선할 때에 열광하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주님을 찬송합시다” 성프란시스코가 자서전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혹시 자기 자신을 우상화시킬 사람이 있을 까하는 염려에서입니다.

3. 거룩하게 드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플라웰은 “건강이 마음의 특징이라면 거룩함은 영혼의 특징이다”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인간 중심의 예배가 많아져 갑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거룩성을 잃어가는 교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국을 나갈 때에 느껴지는 것은 거룩성의 한계의 선을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구원관에서도 보이지 않게 다원적 구원론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유교적, 불교적 기독교가 되기도 합니다. 교인들을 모으고, 교인들의 취향을 도와준다고 하던 문화교실들이 활성화되면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주객이 전도되게 합니다.

일간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습니다. ‘고 김영삼 대통령 추모 부활 성시 기념 예배’ 한국복음주의총연맹이 주최한 이번 추도예배라고 하는 데 49일에 열린 것입니다. 49재는 불교의식입니다. 여기에 49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 까지를 중음(中陰), 중유(中有)라고 부른다. 명부시왕전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시간인 것이다. 7일마다 시왕을 바꾸어 가며 심판을 받는다. 49일 안에 일곱 번 심판을 받는 셈이 된다. 이때의 영혼을 흔히들 중음 신(中陰神)이라고 한다.

아직 사후 인생이 결정 안 된 불귀의 혼인 셈이다. 그 7일이 일곱 번 되는 49일 동안에 다음 생을 받을 연이 정해진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는 죽은 영가를 위해 매7일 마다 재를 올리고 7.7일 즉 49일째 되는 날 그 동안 다음 생을 받지 못하고 중유, 중음으로 있는 영가를 위해 천도재를 올리는데 이 불교의식이 49재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추모예배를 49일되는 날 예배를 드리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49재는 윤회사상이 근본입니다. 천국을 부인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물론 부활을 설교했다고 하지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습니다. 다른 신문은 기사를 쓰신 분이 기독교인지 49일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추모예배라고만 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평신도인 기자도 아는 것을 왜 장로의 가정이나, 이를 주관하는 목회자들은 알지 못할까?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은 거룩한 곳에 있습니다. 준비하는 정성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준비가 없는 예배는 이미 거룩성을 잃어버립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에 의한 구별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함부로 할 수 없게 하고, 정성을 다하게 하고, 진심을 다하게 하는 구별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9절)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주님이 우리들을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는 것이기에 먼저 예배드리기 전에 용서와 화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꺾으시는 분입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좋고 튼튼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바로 레바논 백향목입니다. 교만의 상징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5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시는 분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덴마크 격언에 “큰 종이 울릴 때 작은 종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작은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자기 자신의 영원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작고 적은 삶에서의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사랑을 믿고 경험하는 자가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근본적이고 어마어마한 문제가 해결되신 분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여유를 가지며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를 드리며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그 사랑으로 구별된 거룩한 삶과 거룩한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곳에 예배를 통한 영적 체험이 있습니다.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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