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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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1월 22일            감사의 실제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히브리서  9 : 24 - 28
추수감사주일하면 미국의 건국의 사람들이란 생각과 청교도와 필그림이란 단어가 떠오르며 메이플라워호가 떠오릅니다. 청교도는 16-17세기에 인위적 권위와 전통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성경에 철저한 복음주의적 성서주의, 도덕적 순수성, 낭비와 사치의 배격,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를 쓰던 사람들입니다. 필그림이란 나그네, 순례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순례자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그 청교도들,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네덜란드로, 네덜란드를 떠나 북 아프리카에서 1620년 11월 9일 메이플라워호에 102명이 승선하게 됩니다.

1621년 2월 28일에 지금 플라이머스에 도착, 오는 도중 46명이 사망 그리고 도착해서도 죽어가게 됩니다. 다행히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그 곳에서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가을에 수확을 하게 됩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초청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사냥을 나가서 칠면조를 많이 잡아온 것이 유래가 되어 칠면조고기를 먹게 됩니다. 도와준 인디언들에게 감사,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라 러셀에서 살던 청교도들인 휴거너 즉 프랑스 청교도들이 세운 도시 뉴러셀 그리고 그들이 세운 교회의 역사가 스며있는 교회의 터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은 칠면조, 한 해에 수확 그리고 오늘날 가족들이 모이는 날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러나 그 중심과 실제는 칠면조와 수확과 열매 혹은 가족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이 얻은 수확과 칠면조는 세상적인 가치에서 보면 감사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감사의 실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감사의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새 언약의 제사 즉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의 제사와 비교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릴 예배입니다. 그것은 속죄의 제사가 아니라 감사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시대는 속죄가 제사의 중심이었다면 신약시대는 감사의 제사가 중심인 이유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의 기쁨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도 구약시대에 살고 있고는 신앙인들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믿으며 살아가며 그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유대교인들처럼 살고 있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메시아로 오셨는데 아직 메시야를 기다리며 찾아다닙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 찾아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아니면 유교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나누지 못합니다. 책임은 지려하지 않고 권위만 따지기도 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정죄와 비판이 가득 한 삶을 살아가며 절망이 좌절이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오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으로 착각하고 오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랑을 외면하여 예수님을 인생으로만 취급합니다. 그러므로 선생, 랍비의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를 잊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으로 착각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제도에 비유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줍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지시로 만든 성막과 성물이 있는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참 것의 그림자가 아닌 실제 즉 참 것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표 중에 하나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이며 완전한 제사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 나셨느니라”(25, 26절) 구약제사의 중심은 속죄입니다. 희생제물을 통한 자기 자신의 죄의 고백과 대속의 은총을 받기 위해 매번 성전을 향합니다. 평소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가 일 년 중 속죄일인 유태력으로 7월 10일에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성결하게 한 후에 지성소에 들어가 무흠의 희생제물을 통한 피를 시은좌 즉 은혜가 임하는 자리 즉 법궤 위에 그룹들이 있는 곳에 뿌리게 됩니다. 매년 속죄일에 행하는 대제사장의 의무입니다. 대제사장이 만일 정결하지 않거나 흠이 있었던 제물의 피를 뿌리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물론 지성소에 다른 제사장이나 사람들이 들어가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행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단 번에 드려진 속죄제물이 드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용서의 확신을 가지면 그 은혜와 사랑 가운데 거하며 누리고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은혜가 임해 있건만 은혜 찾아다니며 자기 스스로 지성소와 성소의 휘장을 치면서 하나님과 격리 혹은 단절을 시도하는 어리석음으로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나누지 못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하실 까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를 않기에 그 사랑을 찾아 나섭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행위로 잘 보여야 은혜와 사랑을 받고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반복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계속해서 회개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죄를 계속해서 지적하며 정죄합니다. 이웃에 대한 용서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고 통과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사랑을 확신하였기에 비록 인간의 눈에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소망을 주시기에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주신 것을 통해 최선을 다하여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미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오늘 날 미국의 풍요로움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의 선조들은 믿음을 찾아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고, 남미는 정복을 위해 물질을 탐하였기에 오늘날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선교, 그리고 전구목사님의 어려움을 통하여 미국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하며, 상하 양원의 개원에 목회자의 기도로 시작하고, 지폐에도 In God we trust라고 새기며 국가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고, 그리고 국조도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의 비유로 나오는 독수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남미는 정복을 위해 복음을 사용했고, 북미는 믿음을 위해 자신들을 사용했던 것이 다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7,28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인생 모두가 아는 사실, 진리입니다.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알면서도 잊으려고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알고 있지만 믿음이 문제인 것은 천국입니다. 천국의 확신! 이미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시민권자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미 복의 근원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미 영생을 살고 있는 자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스폴쳔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천국 시민권자로 이 땅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여행 계획을 세웠을 때, 이민 수속을 밟을 때에 이미 그 여행할 곳, 이민 갈 곳에 마음이 가 있음을 누구나 다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보고, 준비합니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가야할 곳에 마음은 가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준비합니다. 여행 시에 그 지역을 여행한 분의 도움으로 안내 책자를 준비하고, 그 곳에 있는 정보를 자세히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가보지 않았기에 믿고 읽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미리 그곳을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천국에 대하여 읽어보아야 할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믿고 준비하는 삶, 바로 그곳에 미리 천국을 누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속죄를 통한 용서의 은총을 이미 받은 구원받은 자이기에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임재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곳에 청교도들의 감사의 예배의 근원이 있었습니다. 어렵고 세상 적으로 부족해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가운데 소망을 가짐으로 자족의 기쁨으로 수확의 열매에 감사할 때에 자기 자신과 후손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을 경험하며 전하게 됩니다. 이미 풍성한 사랑 가운데 있고, 이미 천국 시민권자이기에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가운데 천국을 살아가기에 삶의 현장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 나누는 것이 감사의 예배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배는 이미 속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그 사랑을 누리며 드리는 감사의 제사인 것입니다.

구약 속에서 율법 가운데 살아가지 말고, 한국의 문화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은혜를 받겠다고 이곳저곳 두리번거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총을 받은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하면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리는 천국시민권자로 살아가는 필그림 즉 순례자의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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