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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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0월 25일            'Faith Has Made You Well'
  설교 :     서용정 목사
  본문 :     마가복음  10 : 46 - 52
오늘은 우리 교회의 특별한 날입니다. 예배가 끝난 직후, 집사, 권사, 장로 밎 평신도 공천위원들을 선출하기 위한 공동의회가 있습니다. 작년에 저희는 교회에 첫 한국 사람이 아닌 교우를 제직으로 선출했습니다. 제 개인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비한국인 임원이 있는 한국인교회는 엄청난 일입니다. 오늘은 또 다른 처음이 생길 것입니다. 교회의 36년 역사 처음으로 EM 장로를 선출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같이 해온 여정이 얼마나 아름다지요! 그 여정을 떠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최근 EM에서는 성장하기 위해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교인들이 이 여정을 떠나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15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이동하고 계셨습니다. 46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 뿐만 아닌 많은 무리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같이 걸었던 것이 언제였습니까? 깨끗한 자연과 운동은 뒤로한 채, 친구들과 소통하는 것이 더욱 소중하지 않았습니까?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행은 이런 상황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이 때는 자동차나 라디오나 전화기가 없었습니다. 긴 여행에 대화만큼 좋은 게 없었던 것입니다. 같이 여행하는 것은 또 혼자 여행하는 것보다 안전할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15마일 반경 안에 사는 사람들(12세 이상의 남자)는 그곳에서 유월절을 기념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때에 그 여정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단지 유월절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당시 유명했던 그 분과 함께 걸으며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완전 무료로 즐기고 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또 다른 배움의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방법 중 하나로, 함께 걸으면서 가르치는 것은 매우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과 사람들 모두가 걸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거기에 있었던 한 제자의 관점으로 풀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같이 걸으면서 배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듣고 싶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또 그 말씀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음이 편치가 않아. 나처럼 제자도 아닌 사람들이 집중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나 있는 것일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지만 너무 산만해. 계속 웃고 즐기는 것이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더 믿음 있는 나 같은 제자들은 계속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가야 돼. 더 잘 듣겠다는데 뭐 어깨나 팔꿈치가 부딪혀도 괜찮은거야?. 모두 조용히 좀 하세요! 그냥 사람들이 조용히만 하면 예수님을 더 잘 경청할 수 있을 거야. , 이런… 이젠 누가 고함을 지르고 있어. 정말 가관이로군. 무리들이 이미 소리 지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어떤 구걸하는 사람마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어렵게 만드는군. 와…정말로 고집이 센 사람이네. 모든 제자들이 나서서 말을 해도 도무지 듣지 않는군.

이 사람이 너무 소리를 크게 질러서 주위에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짜증을 내고 있다. 심지어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해도 이 눈 먼 거지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구나!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님을 정치인이나 군인으로 보는 것인가? 하! 이 거지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거야. 못 배운 것이지. 정말로, 나처럼 괜찮은 학생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이제 그만 조용히 하면 참 좋겠다.

어라? 왜 사람들이 안 움직이는 거지? 예수님이 나에게 이 눈먼 거지를 데리러 오라 하시는데,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 하는데, 왜 예수님은 이 거지에게 시간을 주시는 것일까? 하지만 예수님이 원하신다면 순종할 수 밖에…

“이봐, 자네 이름이 무엇이냐? 바디매오? 그래, 바디매오, 너 오늘 복 터졌다! 일어나봐! 예수님이 널 부르신다!” 이보게 자네, 겉옷을 떨어뜨렸네. 저것 보게 저 사람이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뛰어가는군. 와, 사람이 저렇게 빠른 것은 처음 보는 거 같아”

지금 예수님이 바디메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라고 물어 본거야? 그럼, 나는? 나는 왜 그런 기회조차 없었던 거야? 만약에 나에게 물어보시면 뭐라고 답할까? 새 낙타? 그건 너무 이기적이지. 세계평화나 배고픔을 없게 해달라고 한다면… 너무 힘들겠지? 뭐라고? 눈을 뜨고 싶다고? 엄청난 요청인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까? 와 바디메오가 눈을 떴어! 더 이상 눈먼 사람이 아니야.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눈을 떴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제 바디매오는 우리와 함께 예수님에게 배우면서 예루살렘으로 여정을 함께 여정을 같이 하게 되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두 가지의 태도를 알려주는데, 하나는 이 여정을 도울 수 있는 마음과 또 다른 하나는 여정을 해칠 수 있는 마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태도는, 제자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고 싶어 합니다. 힘들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15마일 여정은 아무 것도 아니죠.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배움에 방해되는 요소들로 인해 쉽게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방해 요소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울부짖으며 찾는 사람들을 돕지도 못하고, 오히려 침묵 시키려 하고 그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내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어쩌면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고 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을 빼앗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우리는 자아에 도취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방해요소가 되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동일한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신앙의 표현이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역할 수 없어’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용히 기도를 하고 싶지만, 어떤 이는 기도할 때 울부짖고 가슴을 치기도 한다. 교회들은 너무나 쉽게 그런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거나 또는 멀리 떠나보내기도 한다” 이 상황은 우리와 아주 다른 사람들과 상대할 때도 볼 수 있습니다. 문화나, 경제적으로, 아니면 성격이나 피부색으로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점으로 섬기고 싶은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은 가끔 사람을 도와주러 급하게 가는 길에 또 다른 사람을 치고 가는 구급차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은 자주 있습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모르고 하기 때문에 무서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실 때 제자들과 사람들이 그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지만, 그 일이 예수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인지 또 그렇게 행하실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바디매오와 같은 사람들을 아래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태도는, 눈먼 바디매오와 같은 마음입니다. 바디매오는 소경일 뿐 아니라 거지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많이 없지만, 그가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한동안은 훌륭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한가지를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1)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왕으로서의 메시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윗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도 틀린 생각입니다.

2) 그는 외투를 벗어 던지면서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외투는 괜찮은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는 그에게 유일한 돈벌이였습니다. 그 때 거지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지는 동전들을 받기 위해 외투를 크게 펼쳐놓고 구걸하였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거지이기를 이 때 포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를 때, 그는 걷지 않고 뛰어 갑니다. 예수님께 가고 싶었던 것이고, 그의 행동은 상당히 인상 깊습니다. 3) 치료된 그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바디매오가 치유된 이유는 그가 헌금을 잘 내고 말씀을 잘 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는 예수님이 그를 도울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치유된 후, 52(43)절 말씀은 “곧 보게 되어 길을 따라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길” 이라는 표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 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뢰의 태도가 자라가는 동안 우월감의 태도는 우리 신앙의 여정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새로운 제직들을 선출하게 되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요? 이런 의문들이 생길 것입니다. “추천된 사람들을 뽑아야 되나?” 라던지 나아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추천됐지?”라는 질문에 오늘 본문 말씀은 답을 합니다. 아마 우리가 제자들과 더 비슷한지 아니면 거지 바디매오와 더 비슷한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믿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 모두입니다. 제자들과 같이, 선입견들은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함께 그 여정에 동참하도록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멀리 하려하지 않으십니다.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데 있어 부적절한 신학을 사용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믿음을 가진 바디매오를 칭찬하십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소신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믿었고 그와 같이 행동했습니다.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울부짖으며 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공천된 우리 제직들도, 정확한 신학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도 또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온전케 하는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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