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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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설교                                                
  2015년 9월 6일            제자의 삶
  설교 :     전  구 목사     [니카라구아 선교사]
  본문 :     마가복음  8 : 34 - 38
여러분들의 염려와 기도로 이렇게 여러분들과 하나님께서 이루신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교도소라는 곳은 인간이 한계를 시험하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또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은 없었지만 희망 없음의 잔인함을 절절히 느꼈던 곳이었으며, 절대적 인권인 자유가 빼앗겨질 때, 그 인간이 느끼는 처참함을 보았습니다. 저의 경우도 2평이 되지 않는 조그만 방에서 9명이 지내면서, 일주일에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단지 2시간 뿐, 나머지 166시간은 꼬박 갇혀 있게 됩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은 평범한 상황에서 볼 수 없는 자기의 내면세계를 봄으로 그 전까지 볼 수 없었던 내적인 성찰, 존재의 근거를 알게 됩니다.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발가벗은 듯이 드러나며 희망 없음으로 오는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생존 불안의 상황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임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그 한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실수함 없으신 섬세함과 능력과 그 분의 깊은 간섭과 놀라운 역사하심을 절절히 체험하게 됩니다. 그 분이 아니면 안됨을 깨닫게 되고, 그 분으로 인한 감사와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파수군이 새벽을 기다리듯 그 분만을 추구하는 존재의 메마름을 체험합니다. 절망 가운데 무너진 것 같지만 희망을 품은 자로서 매인 자 같으나 진정한 자유 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은혜의 역설적인 비밀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 믿는 자로 역설적인 은혜를 누리는 에밀리오 오콘이란 마약사범을 감옥에서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들어올 때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밝았고 평안했습니다. 치포테(Chipote)라는 수용소에서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뒤에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내가 너와 함께하니 두려워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린 시절에 교회를 다녔기에 성령의 임재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이 감옥에 들어온 것에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며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셨다고 간증을 합니다. 저는 그 때, 은혜로 살리는 것이 복음의 본질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어 주는 은혜로서 우리의 인생은 바로 덮어 주시는 그 하나님의 큰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서 선교, 전도,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덮으시는 은혜를 가장 잘 드러낸 사건이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 사건입니다(창 9:18­29) 노아의 방주 사건은 홍수가 끝난 후에, 우리와 같이 그 구원 받은 노아가 다시 흐트러지는 모습으로 희귀하게 끝을 맺습니다. 술에 취해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누워서 잠을 잘 때에 세 아들(셈, 함, 야벳)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 함이 그 벗은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샘과 야벳에서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고 뒷걸음으로 다가가 덮어 가려 줍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인입니다. 구원을 받고도 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죄를 짓고 다시 술에 취해 버리며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런 심판을 보았으면 정신 차릴 만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많은 희귀한 일들이 발생하여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도 있지만, 자신을 제일 많이 놀라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어떻게 이렇게도 변하지 않는 지, 어쩌면 이렇게도 둔하고 깨닫지 못하는지, 죄를 벋어 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포기해 볼 때도 많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적하고 들춰냄으로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율법으로는 구원의 축복이 없고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뒤 걸음 쳐서 들어가서 부끄러운 모습을 옷으로 덮어 줌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오직 덮어 주는 은혜에만 축복, 즉 구원의 축복이 있습니다. 죄 속으로 반복해서 찾아 가는 우리 인간에게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무지개로 종결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의 정답을 제시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노아의 방주의 결론입니다. “너희는 죄를 지으면 홍수와 같은 징벌로, 불과 같은 노여움을 얻게 된다” 성경이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택했다.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고 결정했다”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은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덮어 주시는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지적해서는 절대 구원의 결론에 도달 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함은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지적을 해합니다. “너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 모양이냐?” 이것이 율법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내가 너를 안다. 너는 내가 덮어야만 살아”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여전히 벌거벗은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으시고, 셈과 야벳과 같이 하나님께서 뒷걸음질로 가셔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어야 깊이 깨닫게 됨으로 우리 존재는 드디어 평안을 누립니다. 이 은혜로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영은 반드시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시도를 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으로만 채워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게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과 온전하게 연합이 되어야만 존재의 만족, 의미, 기쁨,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온전한 연합이 없으면 우리의 존재 안에는 큰 빈 공간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빈자리를 그 공간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메우려고 시도를 다 해봅니다. 인간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고,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인데, 그런데도 내 마음에는 아직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크기만 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상처 받고, 실망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하나가 도덕적 윤리적 삶을 통해서 스스로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만족함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모든 집회도 빠지지 않음으로 자기의 의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결국 인생이 주는 것에서는 만족이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됨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과 결단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자신이 귀하게 여긴 모든 것을 내리고, 비우는 작업이 천천히 시작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지혜로우면 얼마나 좋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지혜롭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가 채워보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으로 만족함을 배우지 않고 계속 자신의 방법으로 하겠다고 고집 피우면 결국 하나님이 간섭을 초청하는 경우가 됩니다. 잘못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만 만족함을 배우고 그 분을 소원하며 살고자 하는 갈증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자르기 시작하십니다. 자신이 만족을 제공해 주던 그 것들을 직접 절단해 주십니다. 그래서 생각지 않은,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자신의 삶에 생깁니다. 어느 권사님 가정의 두 자녀가 대학 졸업한 후 조울증이 발생하기도 하며 은퇴해서 이제 즐길 만한데 목 뒤에 종양이 발견되었는지 질문하는 분도 계십니다.

결국 인생이 자기 계획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 믿고 나가야 됨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냇물을 찾는 목마른 사람과 같이,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영성을 갖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 이 큰 공간을 메꿔 보려고 애쓰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하나님, 당신이 하셔야만 하는 일이네요. 제가 할 수 없어요.” 하면서 스스로의 능력과 스스로의 노력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자기 부인의 절대적 필요를 내 존재 안에서 확인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고난과 어려움을 동반한 삶의 사건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고난과 어려움은 믿는 자에게는 필수적인 통관 의례가 됩니다. 감사한 것은 그런 기간에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현실 속에서의 천국 체험입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에 가끔씩 천국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온전한 비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온전한 내려놓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자기 부인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내 존재 그 곳에 하나님의 것으로만 채워졌을 때, 성령님의 100%로 나를 장악하셨을 때 천국의 체험을 하게 되는 은혜를 입습니다. 그 완전 장악 가운데 지내는 천국의 체험 가운데는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어려움과 고난을 축복의 기회로 해석하지 않고 불평을 하면, 어려움을 절망, 좌절, 허무, 비관, 자기 연민으로 깊이 빠지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면 이 어려움과 고난을 축복으로 해석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는 고난을 당할 때,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라고 합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감사와 감격으로 승화시키시기를 빕니다. 승화시키는 역설적인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또 말씀합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십자가가 자신의 원수나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그런 대상, 또는 그런 질병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의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모두가 십자가 원리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나 이외에 다른 존재를 살리는 원리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존재를 유익하게 하는 삶의 원리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존재를 위해 나를 비우고, 나의 것을 내놓고 나 이외의 존재를 위해 나를 내어 주는 삶, 즉 나는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의 원리가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나는 살게 되죠.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말씀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내 삶에 주어진 고통, 고난, 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골고다의 언덕까지 억지로 끌고 가야 하는 고 인생의 고난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비우는 삶의 원리가 바로 십자가의 원리이고, 그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을 두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 능력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힘과 다른 힘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은혜, 역설적인 삶, 그럴 때, 진정한 기쁨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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