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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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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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8월 30일            함께 가자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아가서  2 : 8 - 13
기독교 가정과 교회가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기독교 가정의 이혼율과 비기독교 가정의 이혼율이 다를 바가 없다고 합니다. 분명히 달라야 하는데 말입니다. 경제 협력 개발기구(OECD)에 소속된 나라 가운데 자살율 1위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연예인 자살한 소식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기독교인 연예인이 자살한 소식입니다. 장례식 소식을 전할 때에 위패와 관에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현대 교회, 분쟁과 다툼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평안과 기쁨이 가득해야 하는 곳에 불안과 슬픔이 가득하다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혼자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함께 가고 있는데, 그 함께 가는 대상이 누구인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나누는 열쇠를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농촌에 있는 처녀 술람미 여인과 모든 것을 가지고 나라에 군림하던 솔로몬 왕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의 사랑의 관계를 비유하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 연약한 인생이며 보잘 것이 없는 우리들의 사랑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8절은 술람미 여인이 달려오는 솔로몬 왕의 모습입니다. 9절은 그것을 바라보는 슬람미 여인의 자기 자신의 간절하고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10-13절은 솔로몬 왕이 슬람미 여인에게 결혼하자는 청혼하는 모습입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의 사랑, 매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삶으로 응답하고 계십니까? 사랑의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나누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어떻게 함께 가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1.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최초로 불리 운 것은 안디옥에서 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예수님을 자기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구원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믿고 누리는 자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와 함께 가는 삶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함께 가는 삶입니다. 이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임마누엘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누리고 나누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존재할 수 없는 인생임에도 이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절)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께서 대속의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항상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문제는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곳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역자들이 많은 경우에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가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거나 모릅니다. 사역자들이 많은 경우에 자기 자신만이 걸어가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거나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가는 곳에서 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예수님의 그 사랑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함께 가는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16절) 일방적 관계는 교제를 통한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순간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습니다. 자기 자신의 소속에 대한 응답이며 반응입니다. 이에 응답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나누게 됩니다.

2. 성도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성도들과 함께 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가족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에 교우들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업체, 그리스도인의 직장에서도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감은 성도들과 함께 감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가는 삶은 함께 연합하며 동거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도들은 동반자이며 동역 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관계를 몸의 각각의 지체를 통해 비유합니다. 사실 지체는 다릅니다. 몸에 지체들이 따로 가지 못합니다.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었기에 따로 감은 부패되거나 말라 굳어지게 됩니다. 가정이나 교회의 모든 각각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성격도, 문화도, 학벌도, 재력도, 사실 모든 것이 다릅니다. 이러한 다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자기 몸을 위하는 것으로 한 마음이 될 때입니다. 자기 몸을 위한다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떼쥐페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서로 들여 다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것이다” 함께 주를 바라보며 지체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함께하는 것을 알 때에 그 사랑으로 연합하게 됩니다. 다름이 서로 보완하고 돕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이러한 연합은 동거동락(同居同樂)으로 나타납니다. 함께하는 것은 삶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성도의 즐거운 일에 질투와 시기가 생긴다면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아픔을 더 크게 한다면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사랑의 열매가 익어갑니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3절) 무화과와 포도나무는 번영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3. 선한 싸움을 싸우며 함께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함께 가는 곳에 장애가 있게 됩니다. 함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그 장애물은 세상에 물들은 자기 자신입니다. 즉 옛 사람입니다. 주님과 성도들과 함께 가는 데에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오랜 세월 물들은 생각이나 뜻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데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8절)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만나러 오는 데에 산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달리고 넘어온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이를 극복하게 됩니다. 간절한 소망을 가진 곳에 극복하는 힘이 나옵니다. 선한 싸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되새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인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질 때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15절)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작은 여우는 악입니다. 작은 여우는 자기중심의 삶입니다. 포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작은 여우를 잡으려면 먼저 경계심을 놓으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자기 자신을 전지전능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욕심을 버리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좇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전투는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데에서 승리합니다. 경건의 연습을 통해서 승리합니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서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 사랑의 확증이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곳에서 누리고 나눕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 사랑을 한 없이 주신 성도들과 함께 가는 곳에서 누리고 나눕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 사랑을 방해하고 장애물이 되는 자기와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곳에서 누리고 나눕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가족 교우들인 성도들과 함께 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선한 싸움에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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