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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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8월 23일            사랑의 표현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시편  84 : 1 - 12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집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집에서는 자녀들의 교육상 하나님에게 사랑의 표현을 하지만 가게나 사업체에서는 어떠한지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배우거나 혹은 가르치는 곳에서도 하나님에게 사랑의 표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함께하는 이웃 사이에서는 어떠한지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문제는 보람된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면서도 실제의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한 어느 신학자의 말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남는 시간을 쓰는 여가로 여기는 여가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아니한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할 일 다 하고 조금 남는 시간, 자투리 시간에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라 자손의 시라고 말하지만 고라 자손이 보관한 시편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시편의 깃딧은 기쁜 곡조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방 지역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 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살다가, 이제 절기가 되어 성전을 향하여 올라오며 인도자가 부르는 시편을 고라자손이 모은 시편 중에 하나로 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가득 담긴 시편입니다. 자기 자신과 믿음의 공동체인 성도들이 함께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3절) 각자의 구체적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함께하는 사랑의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9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절) 하나님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성전을 사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구별된 곳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과 관계되어진 것을 향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점거해 보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되어진 것에는 성(聖) 자를 붙임으로 구별되게 부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가를 보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점검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함부로 하는가? 아니면 존귀하게 여기는가?” 현대의 영적인 타락은 보이게 하나님과 관계되어진 것을 함부로 여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편기자는 디아스포라, 이방지역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바라보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기를 간절히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 간절한 마음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 정도임을 고백합니다. 얼마나 애타는 지, 그것이 건강에 영향을 줄 정도입니다. 시카고에 있을 때에 병상에 오랜 기간 동안 누워 계신 장로님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려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평생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신 장로님이시만 성전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절) 시편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에 둥지를 틀고 있는 참새와 제비에 대한 부러움을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간절한 지 동물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과의 관계된 것에 대한 마음의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생기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절) 또한 주의 궁정 즉 성전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영적인 영역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영역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주권을 맡김으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음을 아는 삶을 사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궁정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삶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1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해라고 표현 한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는 그 온기로 모든 생물을 살리고, 그 빛으로 밝히 사물을 분별하게 하여 희열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의 온기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며 그 진리로 우리를 밝혀 주시고 또 그의 영력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십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이란 의미는 깊은 교제 속에 사는 한 날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살아가지 않는 다른 천 날보다 낫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며 구체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더 깊이 알아가는 기쁨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와야 함을 의미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 찬양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감사 합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기쁨이 간직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4절)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사람과의 교제를 우선시하는 곳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깊은 교제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 가?

3.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교제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교제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가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믿고 따를 때에 교제는 더욱 더 성숙되어 가게 됩니다. 교제는 상대방에 대하여 알기 시작하고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그저 누구인지만 알고 만나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이 상상하는 상대방과의 만남에서 머물기에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은 우리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인생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며 묵상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를 알게 하기 위해 사역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세우신 사역자들과 함께 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 때에 함께 수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잘 알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 깨달음을 가질 때에 자기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 뜻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미 주님을 영접할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교제의 깊이가 자기 자신의 믿음의 어림으로 얕을 뿐입니다.

물론 교제가 믿음의 장성하면서 더욱 더 깊어 갑니다. 마치 부모나 조부모가 자식이나 손자 손녀를 눈높이에 맞춰 교제를 나누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교제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는 과정 속에서도, 만남을 통한 열매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을 우리들이 누리게 해 주십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디아스포라 즉 이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순례의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며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함을 말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5-7절) 이방지역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오는 것은 그렇게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광야의 길을 거쳐야 하고, 때로는 강도를 만나기도 합니다. 바로 눈물 골짜기로 표현하는 이유입니다. 스폴전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모하는 종들에게 이중적으로 갚아주신다. 처음에는 그 일을 하는 도중에 위로와 기쁨을 주시고, 나중에는 그 일의 열매를 주시는 것이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형태는 다르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을 살아간 사람들은 어떤 사역의 준비과정이나 실행과정만이 아니라 그 사역의 열매를 맺히는 모든 순간, 순간이 은혜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 땅에서 풍성히 누리며 나누다가 천국으로 가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 즉 삶의 현장에서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삶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삶 속에서만이 사랑의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럴 때에 주의 전에 나오는 것이 즐겁고, 이럴 때에 주의 전에서 교우들을 볼 때에 사랑스럽고 즐겁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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