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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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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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6월 21일            은혜 받을 만한 때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고린도후서  6 : 1 - 13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영적 은사가 풍성합니다. 구제와 영적인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적 은사와 능력들이 풍성함에도 잘못 사용됨으로 다툼과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고린도교회는 바울 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 파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덧 복음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추구하는 가치에 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필요한 동시에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도 필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우리 교단 한인교회가 모여서 디아스포라 한인이민교회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UCLA에서 한국과 교포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옥성득 교수와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인 주승중 목사님의 할머니와 부모 그리고 가족들을 통한 생생한 주기철 목사님의 고문와 순교에 관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과의 만남, 동역자들과의 목회 정보를 교환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옥 교수님의 2014년도의 한국과 미주 교포사회의 교회에 대한 분석에서 쇠퇴의 길에 서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과 같이 고린도교회와 같은 현상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육체대로, 인간적으로 받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무엇을 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순종을 통해서 누리는 것임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복음을 이미 받은 자이기에 바로 지금 믿음의 순종으로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즉 주안에서 삶을 살아갈 때에 은혜의 기쁨을,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가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본문을 통해 살펴봅니다.

1. 복음으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먼저 삶의 모든 기준이 복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판단의 기준, 행동의 기준이 복음에 합당한 가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은사와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통해 은혜를 누리지 못함은 바로 침투된 거짓 교사들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침투되는 두 가지 큰 거짓교사는 유대인 중심의 율법주의와 이방인 중심의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이 두 거짓 교사들이 복음에다 율법 혹은 이원론적인 철학 사랑을 첨부시켜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인하며 복음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복음의 기쁨을,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으로 구별되지 않는 공동체가 분쟁과 분열, 다툼으로 복음에서 멀어져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사실 복음은 단순합니다. 예수 구원! 자기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받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자에게 오는 것은 용서의 은총으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화목의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사회에 빛을 밝히게 됩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전 국민의 1%밖에 안 되던 기독교가 독립운동 혹은 사회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 당시에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이 안타까워하며 감옥에 들어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 국민의 25%가 된다는 기독교는 사회의 근심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의 지탄을 받는 중요한 사건의 주범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에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수도 없이 외치고, 복음을 수도 없이 부르고 있지만 삶의 기준을 다릅니다. 삶에서는 복음이외의 것이 기준이 됩니다. 복음으로 구별된 거룩한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과 동역 자들을 항상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1절) “하나님의 일꾼”(4절) 복음 이외에 다른 것으로 구별된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물론 잠시 누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곧 사라지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은 은혜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냄을 받음으로 그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며 누리게 됩니다. 삶 자체가 사역지가 됩니다. 복음 중심의 삶은 사역자에게 내적으로 영적인 고귀함과 거룩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그 사역에는 핍박과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핍박이 다가오게 됩니다. 이러한 핍박은 인내의 사역을 요구하게 됩니다. 다른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4,5절) 많이 견디는 것이라는 것은 원어의 뜻에 의하면 참을성이라는 의미보다는 초지일관으로 끝까지 참음을 의미합니다. 사역자에게는 고난이 따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이신 주승중 목사님이 할머니께서 들려주셨던 일화를 전해주셨습니다. 왜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에 고개 한번 숙이는 일에 목숨을 걸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에 신사참배는 조선교회의 미래와 존재가 달려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께서 면회를 갔을 때에 솜을 두둑이 넣은 수의를 넣어드리겠다고 하니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답니다. 사모님께서 이유를 모르실 것 같으셨는지 설명하시더랍니다. 고문으로 피가 흘러 그 솜에 스며들고, 기절하면 물을 끼얹어져 물이 솜에 스며들러 천근만근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추위에 얼어붙으면 송곳같이 찌르는 것이 되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쇠사슬에 묶인 채 앞에 넣어주는 콩을 핥아 먹어야 하는데 무거워서 못 간다고 하셨답니다. 가족이 걱정할 것 같아 이야기를 꺼리다가 하신 말씀입니다. 사모님께서 주 목사님이 약해지실까봐 목사님은 살아서 나오시면 조선교회의 앞날은 없다는 단오하게 이야기 하셨는데, 사모님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하신 말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에 말씀드렸던 뉴저지 찬양교회 허 목사님은 개인적인 고통이었지만 사역의 고통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주일날 경찰이 찾아와서 딸의 죽음을 통보합니다. 23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딸입니다. 장례예배에 설교를 하신 목사님이 이야기해 주시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 허 목사님의 인간적인 고뇌와 믿음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나는 지난 주일에 딸을 잃었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그럴 듯한 수사가 아니다. 정말 가슴 한켠에 묵직한 것이 들어앉아 있다.

하루 종일 생각으로 혼자 있으나 함께 있으나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눈물이 흐르고, 식탁에서 기도를 하다가도 울고, 이래서 울컥 저래서 울컥인다. 일 당하고 이거 쉽지 않겠구나, 퍽 오래 가겠구나 싶었던데 비하면 이제는 그런 마음이 많이 가셨다. 어차피 한 두 해에 청산될 일은 아닌 것 같다. 마음이 힘든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툭 털어버리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다. 신학자 한스 큉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해 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고난을 헤쳐 나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그만하면 다행이지 않은가. 나는 이제 아들을 잃으신 적이 있는, 같은 처지의 하나님을 믿는다”

“세상에 다 좋은 일도 없고 다 나쁜 일도 없어서, 내 딸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는 사람도 있고,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하다” 주기철 목사님 손자 되시는 주승중 목사님이 강조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도 두려우셨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도 가족을 걱정되고, 할아버지도 고통이 참을 수 없고,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우선순위를 십자가에 둘 때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제야 당신의 아들이 저를 위해 당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허목사님이 딸을 잃고 한스 킹의 말을 인용한 것도 같은 고백입니다. “나는 이제 아들을 잃으신 적이 있는 같은 처지의 하나님을 믿는 다” 은혜를 누리는 것은 평온할 때나 험난한 핍박의 때나 복음으로 구별될 때에 체험하게 됩니다.

3. 넓은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1-13절) 복음으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삶의 현장에는 풍요로운 넓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마음의 풍요로움입니다. 마음의 풍요로움은 이웃에 대하여 여유로움을 가지게 됩니다. 마음의 여유로움은 용서와 관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번 다녀온 집회에서 스바냐 3:17을 작곡하신 김진호 목사님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가까운 포트리에서 계시면서 목회와 우리교단의 동부노회 노회장을 하고 계신 귀한 목사님이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미 구원받은 자, 영생을 소유한 자, 천국 시민권자인 축복받은 자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소식입니다. 그 신분에만 머물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그 사랑과 용서로 구별되는 삶 속에서 그 사랑과 용서를 전하려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쓸 때에 그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 모든 순간순간이 은혜 받을 만한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특히 암흑 같은 고통의 시간도 은혜누릴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이러한 은혜를 누릴 때에 사도바울과 같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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