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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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31일            응답하는 삶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이사야  6 : 1 - 8
자연재해가 유난히 빈번해 지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얼마 전에 페루에 화산이 폭발하여 많은 어려움을 주고,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화산이 폭발하여 섬 주민들이 소개되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동서고금을 통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조금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뿐이지 일어나는 일들은 비슷함을 역사를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네팔의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보면서, 네팔 산골 마을에 학교에 순진하고 행복한 얼굴의 어린이들이 떠오릅니다.

한 산골 마을의 온 마을 사람들이 지진으로 눈사태를 맞아 모두 죽었는데, 지진이 난 후에 며칠이 지나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며 혹시 그 아이들이 아닐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태리에 폼페이의 최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여러 나라에 계신 선교사님들의 기도 요청을 하며 보내오는 소식에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선교사님들의 고충도 형태만 다르지 거의 비슷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욱 더 약해져 갈 수 밖에 없고,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으로 점점 더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모르겠고, 갈수록 자신을 잃어가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러한 자신을 더욱 더 의지하며 버텨가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점점 더 무시를 당하는 존재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진실 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 세상에서 이대로 사라지는가?” 이러한 고민만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숙한 신앙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면서 이웃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부르심에 하나님께 가서 칭찬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본문을 통해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고,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하면 말로만 하나님은 창조자, 주관자인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한계 속을 살아가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무한의 영원을 주관하시는 절대적 존재임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인동형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함인데 육신의 아버지 수준에서 머무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본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광경을 봅니다. 오늘 이곳에 나오는 스랍은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않는 존재입니다. 여러 스랍들이 신비한 광경을 보여줍니다. 스랍이라는 뜻은 ‘불같은 자’라로서 성결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존귀에 시종을 드는 존재입니다. 각 스랍들은 6개 날개를 가졌는데,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감추고, 남은 날개 2개로는 날면서 서로 화답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앙의 출발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죽음을 통한 존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가 내년에 이 세상에 존재할 까?” “내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까?” “내가 10년 후에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까?” 자존심으로 살아가던 인생에게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바로 죽음의 공포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자기 자신의 한계와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통하여 자신감을 잃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께 맡기면서 나아갑니다.

2.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누리는 삶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한계와 실체를 알 때에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을 대할 때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지함 속에 살아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착각 속에 살아온 인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잘못 알고, 잘못하며 살아온 인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와 위엄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그 때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와 위엄을 볼 때를 의미합니다.

그 때에 자기 자신이 망하게 됨을, 자기 자신이 입술이 부정함을 그리고 자기 자신이 부정한 백성 중에 함께하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입술을 잘못 사용하여 망하게 되었고, 그 무리 들과 함께한 죄인임을 알 때에 진정으로 용서의 은총이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6,7절) 용서의 은총은 이사야가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랍 중의 하나를 택해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용서는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며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아는 자에게 하나님이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삶입니다.

용서의 은총을 받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누리는 자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신앙인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명 즉 하나님이 부르셔서 지시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할 때에 성령이 지시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체의 인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자는 자연스럽게 그 은혜와 사랑에 빚진 자가 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할 때에 모르는 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할 때에 회피하게 되고, 핑계대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실체를 모를 때에 아예 모르게 됩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나는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내가 한다”

소명의 확신은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에서 옵니다. 용서의 확신이 소명의 확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은혜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고, 그 은혜가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사랑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삶의 현장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 오늘 성만찬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으며, 그 죽으심을 전하기를 다짐하는 것이 성찬을 나누는 이유입니다.

이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무엇인지 찾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향하신 순간순간의 삶의 터전에서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 나누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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