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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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4월 26일            사랑받는 이유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요한복음  10 : 11 - 18
“당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 놓으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신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소리를 듣던 어느 여인, 사고로 인하여 흉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외면하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스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기 싫어 한동안 식탁에 앉는 것이 불안한 가운데 절망감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절망감을 통하여 이웃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워집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인생은 좌절하고 낙망하여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리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절대적인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절망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선한 목자와 우리들을 양으로 비유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사랑받는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만이 삶의 의미와 보람 그리고 생명력을 주는 이유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왜 사랑을 받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영생의 인도자이신 예수님이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선한 목자인가 아니면 삯군인가는 진정한 돌볼 수 있는 가, 제대로 알고 있는가, 바른 길로 인도하는가의 유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예수님은 진정으로 우리를 돌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삯꾼 목자와 비교하여 알려주십니다. 삯꾼 목자는 조물주가 아닌 피조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피조물이며 한계 속을 살아가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역자들도 포함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관계되지 않은 위선적인 사역자는 모두 삯군입니다. 삯꾼 목자는 제 양이 아닙니다. 자기 양이라면 자기 자신과 같이 여기고 돌보게 됩니다. 자기 양이 아니고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자기 명예와 힘을 위하여 자기 양같이 여기며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자신이 희생하거나, 손해 보거나 위험할 것 같으면 버리고 떠나거나 달아납니다. 제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인 이유는 인생을 제대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삯꾼은 양을 알지 못합니다. 삯꾼은 안다고 하지만 알지 못합니다. 자기 유익과 자기중심에서 바라보기에 양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아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이 한계 되어져 있기에 알 수 없습니다. 자기 합리화. 자기 보물 상자와 우물에 갇혀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피조물인 우리들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아십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 서로 알게 되는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는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시기에 양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됨을 경험하며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오직 그 사랑 안에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하여 회개한 자가 용서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됩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성막의 휘장이 찢어진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계를 가지고 한 몸이 되는 비결입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과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 경험적이고 지속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 알아 감을 통하여 한 몸, 유기체, 관계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한목자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점 더 차원 높은 가치를 알게 됩니다. 부족함이 없기에 선한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상황과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선한 목자를 경험하게 됩니다. 푸른 초장이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든 상관이 없습니다.

2. 생명을 주신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절) 진정한 보호와 인도와 양육을 받으려면 선한 목자의 사랑을 알고 경험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주는 자의 희생적 사랑을 경험할 때에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제 목회의 사역에 조언자로 여기는 최창욱 목사님은 마틴 루터 주니어 목사님과 같이 공부하신 분으로써 평생 혼자 사시면서 총회에서 아시안 목회자를 비롯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양육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전도사시절에 섬기던 교회가 시설과 모든 면에 여유가 있었기에 전국 혹은 지역 지도자 세미나가 자주 열렸습니다.

그 지역 지도자 세미나를 위해서 오셨다가 개인적으로 시카고 대학에 누구를 만나러 가는데 차편을 부탁하셨습니다. 잠시 누군가를 만나신 후에 점심을 사주시면서 2시간가량 목회자 세미나를 개별적으로 하시면서 그리고 조언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감동을 받으면서 목회의 조언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최 목사님을 만나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쁘신 분이 자기 시간을 내서 식사까지 사주시는 그 희생이 제 마음에 사랑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돌아다보면 우리 자신이 은혜와 사랑에 포로가 된 분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해 주신 분들에게 은혜의 빚진 자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신체를 상하거나, 물질을 희생하거나 많은 시간을 내거나, 감사하는 마음과 은혜를 갚고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희생하였음을 실감하는 신앙인이 될 때에 그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 다면, 그 은혜와 사랑을 확신한다면 성령을 좇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사랑의 확신이 믿음 가운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다시 얻기 위하여 희생하였음을 실감하는 신앙인이 될 때입니다. 다시 얻는 것을 우리들은 소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떠집니다. 자기 자신, 이웃 그리고 자연, 상황과 조건 등을 보는 눈이 제대로 되며 밝아집니다. 주님이 스스로 버리신 자원하는 희생이었음을 실감하는 신앙인 될 때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8절) 버릴 권세,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로마병정들과 유대인들을 물리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도 죽는 죽음입니다. 살 수 있어도 죽는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사랑받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신 사랑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절)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고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8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의 희생 제물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알 때에 그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멸망의 뜻이 아닌 구원의 뜻, 슬픔의 소식이 아닌 기쁨의 소리를 알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적셔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세계, 이 땅에서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 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시기 까지 사랑하신 자가 자기 자신임을 확신할 때에 그 사랑이 적셔오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주님을 따라가면서 주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희생하지 않을 수 있는 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희생합니다. 이곳에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 깊이 경험하면서 나갑니다. 믿음의 성숙, 더욱 더 복을 누리며 성령 충만해져 갑니다. 아름답고 우아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받던 여인이 너무 흉한 모습이기에 시선을 받고 절망하던 순간을 이겨내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감동을 주는 삶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3개월 남은 삶이지만 “자신의 진짜 인생은 3개월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기고 갈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확신을 하며 누릴 때에 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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