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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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4월 12일            삶의 부활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사도행전  4 : 32 - 37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주일은 무엇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까? 부활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삶의 변화로 나타나게 됩니다. 삶 속에 생명의 부활이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기쁨이 없으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뭐 사는 게 이래”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인의 단어가 아닙니다. 헛된 인생 그리고 고달픈 인생이라고 생각하던 곳에 생기가 넘치고 의미가 생기며 보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살맛이 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말해 볼까요! “살맛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영생의 기쁨을 누리기에, 영생의 산 소망이 있기에 생동감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예고된 핍박과 박해 속에서 빈부귀천에 상관이 없이 모여 부족함이 없이 함께하는 모습을 봅니다. 천국의 모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많지 않지만 나눔이 있고, 다름이 있지만 함께함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이 함께 은혜와 감동을 누립니다. 천국과 지옥을 비유하는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식탁 위에 긴 젓가락이 놓여 있고 앞에는 푸짐한 음식이 놓여있더랍니다. 오직 그 긴 젓가락만을 사용해서 먹을 수가 있습니다. 천국은 서로 마주 보며 서로 먹여줌으로 건강해 있고, 지옥은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야위어 있더랍니다. 자기 자신만 먹으려고 애쓰면서 긴 젓가락이기에 먹지 못하기 때문이었답니다.

부활의 기쁨 속에서 삶의 부활을 가져왔기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있음을 본문을 통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1. 하나가 되어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가 되고자 노력을 해 보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만을 알며 쓸쓸하게 됩니다. 남녀노소가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쓰지만 하나가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세와 이세가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경험의 다르고 세대가 다릅니다. 남녀 간의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성별로 그 특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빈부귀천이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에는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빈부 간의 갈등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열등의식, 우월감이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천 간의 갈등의 열등의식, 우월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은 각자의 소견대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사사기에 사사들이 구원하기 위해 출현할 때는 죄가 관용할 때입니다.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내 뜻, 내 생각, 내 마음, 나만, 내 것을 챙기는 인생입니다. 문제는 인간 각자는 모두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 각자는 모두 절대적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맞는다,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머물 때에 충돌, 분노, 다툼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죽을 맛이라고 말합니다. 평안이 사라지고, 만족이 사라져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곳을 바라보며 하나의 지시와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는 공동체에는 하나됨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부활의 소망 가운데 주 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다르지만 한 곳을 바라보기에 한 몸이 되고 한 뜻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32절) 믿는 무리에 하나 됨의 비밀이 있습니다. 성도, 믿음으로 구별된 거룩한 백성입니다. 부활의 기쁨 즉 영생을 믿어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한 믿음으로 한 곳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에 한 곳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다른 것을 바라볼 때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사역 자체를 바라본다거나, 사역자를 바라본다거나, 사역의 방법을 바라본다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사역자체, 사역자, 사역의 방법 등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소망으로 한 곳을 바라봅니다. 모두가 천국을 소망하기에 하나가 됩니다. 천국에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과 칭찬을 소망하는 곳에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을 소망하는 순간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한 사랑으로 한 곳을 바라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에 하나가 됩니다. 은혜로운 교회, 은혜로운 가정!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만을 바라볼 때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을 경험하게 되면 가치관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에서 하나님의 가치로 바뀝니다. 육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바뀝니다. 정욕을 따라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에서 성령을 좇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진정한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 비밀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기에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누림을 가치관을 통해 은혜와 사랑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가치관은 점점 더 성숙되어 갑니다. 천국의 맛을 알고, 멋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가치관을 알아보는 좋은 시금석은 자기 자신의 물질관을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치, 물질주의 사회 속에서는 물질관입니다.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돈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한 너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다” 물질의 가치관이 소유에서 관리로 변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진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노력과 수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이 소유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알게 됩니다.

3. 나눔의 기쁨을 누리며 은혜를 경험합니다.

인생은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가지고 있으면서 쓰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쓰기만 하고 나누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낭비하여 필요한 것조차 없게 만들어 궁핍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누는 삶에는 나눔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주는 자가 복됨을 경험합니다. 나눔의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의 나눔에는 질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역할을 나눕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35절) 먼저 사도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가져와 사도들이 나눠주도록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나눕니다. 즉 예수의 부활의 증언이 되는 나눔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나눔입니다. 복음이 증거가 되는 나눔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나누는 나눔을 의미합니다. 그 나눔으로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눠져야 합니다.

많은 공동체들이 이를 잘못 알아서 적선하는 구제에 머물게 됩니다. 그 구제를 통하여 사역자들이 서로 정죄하며 미워하고 시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먼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는 것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나누는 나눔이 될 때에 영적 경험을 합니다. 어느 성도의 나눔에 대한 자문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자기 배우자의 이름으로 재단을 세우는 것을 의논한 것입니다.

본인을 위해서는 안 하는 것이 좋고, 교회나 자선기관을 통해 익명으로 하는 것이 본인이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해줍니다. 바나바의 역할이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6,37절) 바나바는 소리 없이 바울을 도우며, 믿음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는 도우미 사역을 한 사역자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고 하고 권위자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도 모두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34절) 사랑은 공평한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평안하게 됩니다. 특정하거나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나눔은 도리어 공동체를 힘들게 만들어 갑니다. 필요를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은 욕심을 요구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의 요구를 나누어 줍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영생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을 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삶에 삶의 부활은 보람과 의미를 가지는 생동감으로 각각 다른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하는 기쁨을, 하나님이 주신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기쁨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관리하며 이웃의 필요를 위해서 나누는 기쁨을 누리기에 살아가는 맛이 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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