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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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4월 5일            Easter Moments (부활의 순간)
  설교 :     양희성 목사
  본문 :     누가복음  24 : 13 - 21, 28 - 35
What did Cleopas and his friend feel? Maybe the feeling was “sharp and searing” like a sudden breakup from a long-term relationship?
본문에서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가 한 순간에 깨어질때 느끼는 그런 잔혹한 느낌이였을까요?

Or maybe the feeling was “rounded and heavy” such as when one receives a rejection letter from the college of their choice, from a graduate school, a residency program, or a job of their dreams…
아니면 자신이 지원했던 학교나 연수과정, 또는 꿈의 직장으로 부터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처럼 머릿속이 빙글거리고 무거운 느낌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What did they feel?
그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The Scripture shares that they looked sad. But does the word, sad, even capture their feeling? I wonder.
본문은 그들의 얼굴이 슬픈 빛을 띄었다고 얘기합니다. 슬프다는 단어는 그들의 감정까지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Jesus, the person whom Cleopas and his friend, had placed their trust in… is, in their eyes, dead. Jesus who was to be the “prophet mighty in deed and word” (v. 19), “the one who was to redeem Israel” (v. 21) is (to them) a voiceless prophet with no such power.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신뢰했던 예수란 분은 그들에게 이젠 죽으신 분입니다.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19절)였고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 (21절)로 여겨졌던 예수님은 목소리 없고 힘없는 선지자일 뿐입니다.

Like expectant investors who place their life-savings into a seemingly fail-proof investment, Cleopas, his friend, and many others place their trust in Jesus who was considered more than a fail-proof investment.
마치 안전이 보증된 투자처에 평생저축을 맡기는, 기대에 가득 찬 투자자들 처럼, 글로바와 그 친구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런 안전보증의 투자처 보다도 더 신뢰했었습니다.

The followers of Jesus had faith that Jesus would rise to political glory and bring them along for the ride; we imagine that the followers of Jesus thought: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은 그분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주실거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생각을 했을거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Once Jesus is seated as the great ruler, we will be given positions; and these great positions will bring honor to my family and security to our children.”
“예수님이 최고 통치자 자리에 앉기만 하시면 우리도 한 자리 가질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그런 높은 직책이 우리 가문을 빛내 줄테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도 보장되겠지.”

Yet, their investment goes awry, leaving these investors hopeless like a turtle without its protective shell. They lost much, arguably everything.
하지만 그들의 투자는 빗나갔고, 그 투자자들을 마치 자신을 보호할 껍질이 없는 거북이 같은 절망적인 모습으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What did they feel?
그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Just sad? Maybe they felt terror? Terror because the Roman Empire and a strong contingent of the Jewish community saw these followers of Jesus as rebels who were to be cut away from the community.
그냥 슬펐을까요? 공포감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로마 제국과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강력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을 그 사회에서 내쳐야 할 반역자로 보았으니까요.

Most likely they felt terror. Or why else would they be miles away from the hub of civilization, Jerusalem, and instead heading towards the country village (시골), Emmaus?
아마도 그들은 공포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들이 문명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멀리 떠나 엠마오라는 시골 마을로 향했겠습니까?

On this road to Emmaus, Cleopas and his friend felt much and shared honestly.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글로바와 그 친구는 많은 공감대를 가지고 진솔히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Their conversation may have sounded like the following:
그들의 대화는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Cleopas to friend: What are we to do now?
글로바: 이제 우린 무엇을 해야하지?

Friend to Cleopoas: We? What about our wives and children…? Our child is going to be bullied by his friends and teachers because our family is known as “Jesus followers.”
친구: 우리? 우리 아내들와 자식들은 어쩔건데? 우리 가족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라고 알려지는 통에 우리 애는 친구들과 선생님들로 부터 따돌림 당할텐데.

Cleopas: You are right… and our new business is going to suffer because people will not do business with us because they knew we followed Jesus…
글로바: 자네말이 맞네… 그리고 이제 우리 사업도 곧 힘들어 지겠지. 왜냐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우리랑 사업을 안하려 할테니까.

Friend: I feel so bad for my wife… Before we married, I promised her that I would do great things and provide a comfortable life for our family. And, my child was so close to receiving her Roman citizenship and an internship with the Roman finance department but now her hopes are dashed…
친구: 난 아내에게도 너무 미안해…내가 좋은 것 많이 해주고 우리 가족이 편하게 살도록 하겠다고 결혼 전에 약속했었는데… 그리고 우리 딸은 로마 시민권과 로마 경제부처의 인턴쉽 자리도 거의 받기 직전 이였는데, 이젠 딸이 소망하던 일들도 다 끝이군..

While they were talking and discussing, Jesus “came near and went with them.” (v. 15) They were not aware that it was Jesus, for the Scriptures say that “their eyes were kept from recognizing Jesus.” (v. 16).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예수님은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15절) 성경이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16절) 말한 것 처럼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As they continue to share and, I imagine, therapeutically vent all that has happened, Jesus does not interrupt their sharing but Jesus listens. Let me say that again, Jesus listens.
그들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말로 풀면서 얘기를 계속 나눌때에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방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고 계셨음을 저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셨습니다.

On that long walk toward Emmaus, Jesus comes near, walks with them, and listens to them.
엠마오로 향해 걸어가는 긴 여정속에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까이 오셔서 함께 동행하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What is amazing about this scene is that Jesus does not simply correct their misunderstanding and lack of insight, but Jesus acknowledges their feelings and honors their feelings.
이 장면이 놀라운 점은, 예수님은 그들이 잘 못 이해한 부분이나 부족한 견해를 고치려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감정을 인지하시고 그들의 감정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In short, Jesus spiritually cares for them:
다시 말해, 예수님은 영적으로 그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Rita Charon shares, “Spiritual caregivers are not handypersons to “fix anything” but, instead, are persons privileged with the opportunity “to simply watch…, to listen…, to behold, in awe [a human’s] faith and power and love.”
리타 커런은 “영적으로 돌보는 사람들은 뭔가를 고치려하는 수리공이 아니라, 대신에 단순히 지켜보고, 들어주고, 바라봐주는 기회의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At the hospital where I work, a mom whose child was dying due to cancer started to ask similar questions that the followers of Jesus may have asked such as, “Why is this happening to us?” “What is God’s plan in all of this?”
제가 일하는 병원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둔 한 어머님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했을법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대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As the mother was sharing, we started to walk down the long hallway on our road to Emmaus. And, like the followers of Jesus, we continued to talk and discuss about what was happening.
어머님이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엠마오 길, 즉 병원의 긴 복도를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계속 걸으며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As we continued to walk, another mom whose daughter was dying from one of the rarest forms of cancer joined in on the conversation.
가는 중에, 희귀병을 앓는 딸을 둔 또 다른 어머님이 우리 대화에 가담하셨습니다.

As the moms began to share, I could only wonder, “What did they feel?”
어머님들께서 얘기를 나누실 때 저는 단지 “어떤 느낌이 드셨을까?”라고 생각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All I could do was, as Jesus Christ did for the followers, be near to the mothers and listen.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셨던 것 같이, 그 어머님들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 드리는 것이였습니다.

I wondered if anything good could come out of the conversation.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도움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됬습니다.

While I was wondering, the mothers started to remember stories of their daughters and they shared wonderful stories of them. It was almost as if their eyes were suddenly open (v. 31) and their hearts burning within them from remembering the tender moments (v. 32).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머님들은 각자 딸들이 지내온 이야기들을 회상하기 시작하셨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마치 제자들의 눈이 갑자기 열리고 (31절) 마음이 뜨거워 졌던것 처럼 (32절) 말입니다.

To my surprise, during this heavy and dark moment, where uncertainly loomed, we shared smiles, we shared hugs, and we even shared a few laughs.
놀랍게도, 힘든 일이 당장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러한 마음 무겁고 어두운 순간에도 우리는 미소지었고 서로를 안아주고, 소리내어 웃기도 했습니다.

In short, we all experienced a “life-giving moment.”
요컨대, 우리 모두는 “생명을 주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Yet, how was this possible? How was it possible for us to experience a “life-giving moment” in such a heavy and dark moment where uncertainty loomed?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힘든 일이 당장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런 무겁고 어두운 상황에서 우리가 “생명을 주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The Scripture gives us a clue. Moving along in Scripture, we find that Jesus is invited into a home to have supper with Cleopas and his friend. We imagine that the conversation on the road continued at the table.
성경본문이 그 실마리를 줍니다. 본문의 내용을 따라 가보면 예수님이 글로바와 그 친구가 초대한 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하시는 장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여정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식탁에서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To their surprise, during this heavy and dark moment, where uncertainty loomed, Jesus took bread, blessed and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v. 30). And it was only after this that their eyes were opened to see it was Jesus who was with them all along. And their hearts were burning within them (v. 32).
놀랍게도 그들이 겪는 이런 상황, 힘든 일이 당장에 일어날 지도 모르는 그런 무겁고 어두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십니다. (30절)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눈이 열려 자신들과 그 모든 여정을 함께 계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음을 알게 됩니다. (32절)

Like the two mothers who remembered the stories of their daughters and, as a result, experienced a “life-giving moment,” Cleopas and his friend experienced a “life-giving moment” after partaking in the ritual of remembering the significance of Jesus’ life and death on the cross.
딸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던 두 어머님들이 “생명을 주는 순간”을 경험했던 것 처럼, 글로바와 그의 친구도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기억해 낼때에 “생명을 주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Sisters and brothers, how are we able to experience this “life-giving moment?” Where is the hope of this story in our lives?
형제, 자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 “생명을 주는 순간”을 경험 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그런 소망이 우리 삶속에는 어디에 있을까요?

The Easter hope is in remembering. For it is in remembering that we experience a “life-giving moment.”
부활의 소망은 기억함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억할 때에 “생명나눔의 순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in remembering that we experience “little Easter moments” in our lives.
왜냐하면 기억 할때에 우리는 “작은 의미의 부활의 순간”을 삶속에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Tim Adams’s piece, “Look back in Joy” explains that our brains have the ability to store “good” memories in an area of our brain.
팀 아담스의 “기쁨의 회상”이란 작품에서, 우리 뇌에는 “좋은” 기억들을 저장하는 능력이 뇌의 한 부분중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We have plenty of science geeks in our church so you could ask them to explain! What I find amazing is that our God understood that we needed this storage space in our brains, so that, in times of need, we are able to access the “good” memories and thereby experience a “little easter moment.”
우리 교회에는 과학에 꽤 정통하신 분들이 많으시니 그분들께 설명을 여쭤봐도 될 것 같군요! 제가 찾은 한가지 놀라운 점은, 우리에게 이러한 저장고가 뇌에 필요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좋은” 기억들을 꺼내어 오게끔 하신것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은 부활의 순간” 을 경험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Remembering the “good” helps us see that the story of hope is always in the midst of our stories.
좋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각자의 이야기 안에도 언제나 희망이 있음을 알도록 도와줍니다.

As we access the good memories:
우리가 좋은 기억들을 꺼내 올때:

What we remember is that in our miserable states, Jesus comes near, walks with us, and listens to us, like Jesus did with Cleopas and his friend & how Jesus did with the two mothers experiencing hardship.
마치 예수님이 글로바와 그 친구, 그리고 힘든 시기를 보내시던 두 어머님에게 그러셨듯이,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을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셔서 함께 걸으시고, 이야기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On our individual roads to Emmaus where all hope seems lost and you feel lost, Jesus – even though we do not see him, even when our eyes are kept from seeing him - Jesus is near to honor our feelings.
어떠한 소망도 없이 절망스런 느낌만 있는 우리 각자의 엠마오 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감정을 존중하시려고 우리에게 다가와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없고 우리 눈이 가리워 져서 그 분을 볼 수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That is a “little easter moment.”
그것이 바로 “작은 부활의 순간”입니다.

What we remember is that while we sit down with our families after a long day, and while the business is not going well, or while you received a bad grade, or while your relationship with your family member or friend is strained, or while you did not receive the promotion, or while your co-workers are giving you stress…
긴 일과 후 가족들이 함께 앉았을 때, 하는 일이 잘 안풀리거나 학교 성적을 못받았거나, 또는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승진을 못했거나 직장 동료들이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을 기억하게됩니다.

In spite of all this, you are still able to smile, share a laugh, you are able to taste the tasty food before you, you are still able to see the beauty of your child and the sacrificial love of your parents, and feel thankful for having each other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여전히 미소지을 수 있고, 웃음을 나눌 수 있으며, 앞에 놓여진 진미를 맛 볼 수 있고, 자녀들의 예쁜 모습과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도 볼 수 있고, 그리고 서로를 아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으시다면…

… even if it lasts just for a moment…
아주 잠시동안이라도 느낄 수 있으시다면…

That is a “little easter moment.”
그것이 바로 “작은 부활의 순간”입니다.

What we remember is that what matters more than our lives being miraculously fixed and perfect is that we have a perfect God who finds us miraculous even if we are never fully fixed and perfect.
우리 삶이 기적적으로 잘 해결되고 완벽해 지는 것보다 우리가 결코 온전하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기적적으로 찾아주시는 온전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That is a “little easter moment.”
그것이 바로 “작은 부활의 순간”입니다.

Yet, let us never forget the BIG EASTER MOMENT where Christ once and for all conquered death!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하여 죽음을 이기신 “큰 의미의 부활의 순간”도 잊지 말도록 합시다.

It is from this BIG EASTER MOMENT, the most spectacular moment in history that we are able to remember and experience “little Easter moments” in our lives.
우리가 “작은 부활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것은,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인 “큰 의미의 부활의 순간”으로 부터 온것입니다.

Like energy from a spectacular explosion, the energy never goes away but takes different forms and shapes.
엄청난 폭발로 인해 생긴 에너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과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In that similar way, from the BIG EASTER MOMENT, the spectacular energy never goes away but it takes different forms and shapes in our lives, still today.
이와 비슷하게, “큰 부활의 순간”이 주는 이 엄청난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다른 모습과 형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Let’s do an exercise together to prove this:
우리 한가지 연습을 해봅시다.

Take 10 seconds to simply remember when you experienced Jesus Christ during this week? When did Jesus come and meet you?
이번 한 주간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10초간 생각해 봅시다. 언제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시고 만나 주셨습니까?

What helps is thinking about one person in your life who showed you kindness, sacrifice, or generosity. Or consider one thing that you can be thankful for.
여러분 삶에서 친절이나, 희생 또는 관대함을 보여준 사람을 떠올리면 쉬울 것입니다. 또는 여러분이 감사하는 한가지를 떠올려 보세요.

I’ll look at my watch and count down silently. Ready, close your eyes, let’s all begin, now:
제가 시계를 보고 시간을 제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하시고, 눈을 감아주세요. 그럼 시작.
[10 seconds past]
[10초 후]
What do you feel?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Today, a table – much like the table set up for Cleopas, his friend and Jesus - will be set before us. At this table, when we eat the bread and drink the wine, we will remember what Jesus has done and continues to do.
오늘, 글로바와 그의 친구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차려진 그 식탁과도 같은 한 식탁이 우리 앞에 차려져 있습니다. 이 식탁에서 우리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앞으로 하실 일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The beauty of this table is that all are invited to this table regardless of your skin color, status in society, and other human-made categories that create barriers.
이 식탁의 아름다운 점은 여러분의 피부색이나 사회적 지위, 또는 서로 간에 장애를 조성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치들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초대되어 졌다는 것입니다.

Sisters and brothers, as we eat and drink and remember Christ, I wonder…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에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해 집니다…

…What will we feel?
…우리는 무엇을 느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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