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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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3월 29일            믿음의 찬송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요한복음  12 : 12 - 19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빠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송을 부릅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드리면 아멘으로 함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런데 어떠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상이몽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의 그 환호하는 광경을 보며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만이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유와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일들을 제대로 아시고 계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그리고 이방지역에서 온 유대인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 나와 환영하며 함께 찬양합니다. 왕이나 승리의 개선장군이 오면 흔드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이렇게 외칩니다.

가지고 계신 종려나무 가지로 된 십자가를 흔드시며 함께 외쳐봅시다. “지금 구원하소서(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얼마 안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됩니다. 열광하는 군중들을 보며, 자기 자신들이 예수임을 죽일 모의가 실패한 것 같아 이렇게 말하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전합니다. 저 열광하는 것을 보니 우리들은 죽이려는 계획은 쓸데없는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서로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19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자들의 찬송은 어떠한 찬송인가? 물론 믿음의 찬송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내용의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만끽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진정으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부르는 찬송은 어떠한 찬송이 되어야 하는 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알아봅니다.

1.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예수님을 향하여 종려나무를 가지를 흔들며 흥분하다가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팔거나 배반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러나 군중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여! 주여! 주를 찬양하다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외면하고 배반하며 자기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음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업체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관하며, 자기 뜻을 이루고,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느 덧 신앙은 삶의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16절) 그들이 모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7,18절)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던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이 증언을 하자 소문이 퍼집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자임을 믿었기에,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나사로를 살리셨는지에 대한 깨달음은 없었기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자기 뜻대로 생각합니다. 그 들에게 소원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의 소원, 자유의 소원 그리고 이중적으로 내는 세금도 독립을 하면 로마에 내는 세금은 내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는 충분이 그 일을 해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그 때가 된 것 같아 흥분합니다.

정치적인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세상적 가치로 바라는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바라는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 바라는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며 바라는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이 열광을 하는 모습을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출세의 보장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의 도래해오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출세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집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유명해질 수 있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선교지에 가서도 소망은 세상적인 소망을 심어주려는 선교가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통하여 이루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을 진실 된 마음으로 믿음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제대로 깨닫느냐에 달려있습니다.

2.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는 주제로 3월 31일(화)부터 4월 3일(금)까지 버룩 대학교에서 열리는 성경세미나에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박옥수씨가 하는 이단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교주를 세상적인 표현으로 왕같이 꾸민다는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통일교의 교주가 죽기 전에 문선명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집회하는 모습의 비디오를 보면 왕관을 쓰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시녀들과 추종세력들에 높임을 받습니다. 요즘 대표적인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가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타는 말을 보니 아주 비싸고 기름진 준마를 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북한의 김정은이 탄 말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승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인간의 눈에 초라한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승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신 모습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진정한 믿음의 찬양은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찬양임을 알려줍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도구로 사용하려 합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속이려 하기 때문에 진정한 찬양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위선된 찬양을 보여주려 하기에 스스로 속임을 당하며 착각하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의 찬양은 겸손한 자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5절) “이는 기록된 바” 예수님의 삶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살핍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것을 살핍니다. 하나님께서 하라하시는 것을 살핍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을 살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예수님을 통한 대속의 섭리이기에 그 고통과 고난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도 그 길을 갑니다.

물론 예루살렘 입성 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의 계획이 차질이 나는 줄 알고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19절) 자기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쓸데없는 일 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의 계획은 성공하게 됩니다. 죽이려는 모의가 실제로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부활의 기쁨과 영생의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계획은 성공 같아 보였으나 그들이 의도한 성공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취한 자 같으나 실패된 자들이 됩니다. 그들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을 뿐,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율법의 완성하시기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모욕한 죄인 참람죄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흥분하여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열광하는 백성들을 보며 자기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깨닫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을 무시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나누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만이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진정한 믿음으로 찬양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종려십자가를 들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지금 구원하소서(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찬양을 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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