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  처음으로
   †  교회안내
   †  예배안내
   †  교회약도
     환영의글
   †  교역자소개
     교회연혁
     교회행사
     교회조직
     선교활동
     주일설교
     주간소식
   †  특별집회
   †  예식안내
   †  영어예배
   †  미국장로교
 문자설교                                                
  2015년 2월 1일            그 여자를 기억하라
  설교 :     최재건 목사
  본문 :     마태복음  26 : 6 - 13
지난해 12월 한국에 전쟁설을 유포시킨 여신도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없는 설화나 아무리 은혜스러운 간증일지라도 믿을 것은 못된다는 것을 또 한번 되새겨 주었습니다. 본인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했다고 하고 성령의 역사라지만 악령의 역사입니다. 이 유언비어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문제입니다만 이단 사설에 넘어가는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위협하는 데도 ‘남한은 모든 가정이 다 핵가정이 되어 있다. 골목마다 대포집이 있다. 가끔 왕대포집도 있다. 마시는 것은 폭탄주다. 잘 먹는 것은 부대찌개다. 먹을 때 마다 서로 쏘겠다한다. 오늘 점심은, 저녁은 내가 쏜다.’ 고 농담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여자들이 성령이던 악령이던 영성이 남자들 보다 강하다는데 있습니다. 한국에 점쟁이들이 가짜 목사를 합한 수 보다 많다고 하는데 여자 점쟁이가 남자보다 더 신통하고 여자 무당이 남성 박수보다 더 신통한 자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졌습니다. 기독교의 영성도 여자들이 더 강하다고 알려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는 사람들도 자주 나타납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고 여자는 뼈로 만들었으니까 원자재가 좋기 때문이라고 웃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상대적으로 명성, 명예, 돈 같은 것 보다는 영적인 것,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영성이 더 강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도 여자입니다. 같은 내용의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예수에게 값비싼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하버드대학교의 피오렌자라는 교수가 근 20년 전에 ‘In memory of her’ 란 책을 출판해서 큰 선풍을 일으켰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바탕을 두고 쓴 책이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자는 당시 제자들이 남자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던 일을 깨닫고 예수의 죽음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 큰 일을 한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길에서 하나의 주제, 질문을 갖고 공부하며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기독교가 어떻게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느냐 이었습니다. 어떻게 식민지 국가의 사형수가 외친 하나님 나라 운동이 300년을 땅위에도 못살고 카타콤에서 살다가 세계 최강국 로마를 이기고, 국교가 되고 서구문명의 기반이 되고 미국을 거처 한국에 까지 전해지고 나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답이 오늘의 본문 속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강단에서 이 말씀을 읽고 설교할 때에 값비싼 향유에 초점을 맞춥니다. 300데나리온이란 돈의 가치는 그 당시 노동자 1년의 품삯이라고 합니다. 가롯 유다(요한12:4)도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낭비하느냐고 힐난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관심을 더 두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다. 가난한 자 구제는 기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이 여자의 하는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길이 기억될 것” 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가난한 자 구제보다 자기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의 기름부음과 죽음이 중요하고 구제는 장례 다음이고 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약속하지 않은 이 여자의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지고 기억 될 것이라고 했는지가 관심사입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왕의 등극, 제사장이나 선지자 됨을 위한 의식, 예식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이 메시아 됨의 과정으로 믿고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 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에게 이 마리아는 다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자기가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우리의 메시아라고 우리를 구원할 자로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마리아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의 영적인 안목과 실천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보이지 않는 마음, 정신계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은 신체만이지만 보이지 않는 요소인 마음과 정신력이 더 크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한자로 혼(魂)이라고 하고 혼백(魂魄)이라고도 합니다. “天地之間 萬物中 唯人最貴”하다는 말의 의미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영(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식물에는 생혼, 동물에는 각혼이 있을 뿐이고 영혼은 없습니다. 우리말은 영, 혼, 백을 두루뭉술하게 무분별하게 사용합니다만 기독교나 종교에서뿐 아니라 대부분 인간의 영적인 요소 영성(Spirituality), 영에 초점을 맞춥니다. 영에도 악령과 성령이 있습니다. 좋은 일 바른 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악한 생각은 바로 악령의 역사입니다.

육체는 그 쇠잔하는 날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가야 하는 길입니다. 순서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죽음은 못 막으니까, 장생불노로 목표설정을 낮추었습니다. 진나라 시황제가 동남동녀 3000명을 동원해 불노초를 캐어 오라고 보냈지만 그런 풀도 없을뿐더러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윤준규라는 재미 동포 사업가가 Plato Alto 장수상을 제정했습니다. 실험을 통해 쥐의 수명과 활력을 50%늘리는 약을 3년 이내에 개발하는 연구기관에 $100 밀리온을 시상하겠다고 해서 14개 연구기관이 경쟁을 벌린다고 합니다. 그 약이 개발되고 인간의 삶에 적용이 되면 인간 평균수명이 120-150살로 늘어 날것입니다. 오래 살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150년 산다고 한들 죽게 될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살아야 할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현명한 길은 마지막 날에 대비하고 사는 삶입니다. 동양사상에도 오복이라고 해서 수부귀(壽,富.貴) 다음에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해서 잘 죽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나아가서 영성의 계발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는 영적인 승리로 시작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당할 때부터 영적인 삶과 가치관에 우선을 두고 대항했었습니다. 돌들로 하여금 빵이 되게 하라고 했을 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서라는 큰 명분 앞에 그렇게 했을 법도한데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돈만, 먹을 것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육체를 가졌지만 동물과 다르게 영원을 추구하는 영적인 피조물임을, 그리고 그것이 더 중요함을 각인 시켰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일축했습니다. 천하를 보여주며 절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명분도 다 포기하고 물리쳤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것이 근본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 세월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은 ‘돈’이라고 생각하고 명예라고 판단하고 흔히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핑계하고 우선시합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좋은 점도 많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보다 약 500년 전에 그리스에서 살았던 소크라테스라는 유명한 철학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제2차 페로폰네서스 전투의 갈림길인 포타티아 지역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패전한 그리스는 그 전투에서만도 1000여구가 넘는 시체를 3년이 지나도록 매장도 못하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사람들이 당시 건장한 신체, 힘, 탁월함을 추구하던 것이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그 보다는 절제와 헌신, 정의의 실천, 지혜를 추구하도록 권고했습니다. 부와 명성 명예만 추구하던 그리스인들에게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상태가 건장하게 살도록 사명삼아 가르쳤습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세계와 육신의 종말을 강조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종말에 관한 연구는 버나드 맥긴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과거 300년 동안 진행된 연구보다 더 많이 연구되었습니다. 사실 산다고 하는 것은 매일 매일 육신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최후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지만, 그런 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해 왔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영원으로 가는 과정이고 죽어야 산다.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이 산다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잔다고 하셨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말씀 속에 부활을 예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에 떨어져 죽고 썩어야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만민을 대속키 위한 죽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해한자가 없었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 방법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는 그를 먹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육신이 살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도 영원이 살기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도 내 살과 피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영원이 사는 이치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모택동이 중국 공산화혁명을 하면서 남긴 말 가운데하나 食而爲天이라는 말은 육체뿐만이 아니고 영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기도, 성경공부, 경건한 삶의 당위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대속의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리는 죄와 의에 민감한 자들이 바르게 살겠다는 몸부림 속에 이해되고 전수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체험과 저서를 남긴 분이 어거스틴이고 일본의 우찌무라간조입니다. 우찌무라는 자기희생을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그의 멘토였던 니지마 조에 의해 앰허스트대학에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총장 실리(J. H. Seelye)를 만나 영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실리 총장이 우찌무라에게 “자기 성찰만 하고 네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라는 말이 예수님을 바로 보게 된 기반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샘물과 같은 보혈’이 그리스도의 속죄함이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함을 체험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에 관해 회심기. 구안록 같은 책을 썼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위해서 향유 부은 일을 잘 했다고 칭찬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리아는 예수의 말을 이해하고 믿었습니다. 먹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제자들에게 인류를 위해서 대신 죽는다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여러 번 했습니다. 다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데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도 못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도 몰랐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이해하고 슬퍼하고 향유를 부은 사람은 이 여자 외에는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듣고 깨달았기 때문에 행동화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깨닫고 아는 것만큼 행동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 후에도 무덤에 가보았습니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한 마리아의 영성은 주변의 남자들을 앞섰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달리 육신의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 자체라면 다들 죽는데 무슨 중시할 이유가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강조한 죽음은 만민을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고 영적 삶,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죽음이기에 중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은 부활 했습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세가 있고 영이란 것은 영원한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머리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의 일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입니다. 복된 소식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히 사는 삶이 복음입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를 위한 대신 죽음이란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영원한 예수님과 같은 영적생명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듣고 읽어도 믿어지지 않는 그의 죽음의 의미를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예수께서 구주임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위의 죽음과 부활은 더불어 기독교의 양대 축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죽음으로 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성경의 말씀이 하나남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과 불신의 차이는 성경이 도덕적인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차이입니다. 성경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믿어지면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 주님이란 사실, 거룩한 영이 믿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법도입니다.

3000년전,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안았습니다. 박준서 박사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구약학자가 있습니다. 서울 법대에 들어갈 때 제1공화국의 헌법을 다 외웠는데 4.19때 다시 외우고, 5, 16때 또 다시 외우며 따라가다가 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변하는 법 보다는 안변하는 법을 추구하다가보니 하나님의 법만이 변치 않아서 구약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지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도 믿게 될 것입니다. 영생도 믿을 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사랑하고 나의 모든 잘못을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 달여 죽음으로 내 죄는 사해지고 나는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다 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라는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의 대속의 죽음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성경의 요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주제는 사랑이라는 것을 천명 한데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사랑이 먼저이고 다음이 이웃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하나만으로는 안 됩니다. 손바닥의 앞뒤와 같습니다. 사도 요한도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를, 영적인 것을 우선시 하고 그 다음에 가난 구제 같은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하나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서 죄의 묶여 사는 인간들의 죄를 대신 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인류애의 극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교훈도 인생의 살길을 밝히 보여준데 있습니다. 그 뿐만 아이라 그의 제자들도 마지막에는 다 자기들의 생명을 내어 놓고는 스승의 길을 따랐습니다.

저가 늦게 깨달은 것은 역사의 주제는 자유이고 인생의 주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정곡을 찔러 말씀하셨듯이 개인이건 사회이건 단체이건, 예술, 정치, 경제도.... 모든 것은 사랑이 주제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교훈과 삶에 감동한 인간들의 사랑의 삶이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게 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고 한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삶도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한 사랑과 거기에 따른 보답 차원의 감사가 계속되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삶, 보답,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기독신자의 자세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이 산다는 것은 영적인 삶입니다.

육체의 마지막 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 삶의 평가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자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마태25;42-46 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것이 꼭 큰 자선을 의미 하는 것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목마를 때에 물 한잔 주는 것, 외로운 나그네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 옷 벗은 자에게 옷 한벌 주는 것,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큰일 아니라도 가난하고 돈 없는 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속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그 보답으로 베푸는 크건 작건 많건 베푸는 사랑의 삶이 요청됩니다.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고 거기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감사하는 생활이 반복되는 삶, 그것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예수 믿는 자의 삶입니다.

60대 중반을 넘어서면 어떻게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영적인 삶에 좀 더 몰두하고 애써 번 돈 있으면 잘 쓰고 육체의 생을 마감하는 것! 그럴 때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되고 Alfredo Tennyson처럼 죽음을 앞두고 “주님 뵈오리, 직접 뵈오리” 라고 할 수 있는 시가, 믿음이 생겨나리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자를 기억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에 대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려온 자화상은 어떤 것이고 마지막에 보여줄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각자의 깨달음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육신뿐만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정신의,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대신 죽음으로 우리의 영이 영원이 산다는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죽음이란 것을 확신하고 감격하고 거기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삶의 길입니다.



© 2004-2016   kpcow.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