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  처음으로
   †  교회안내
   †  예배안내
   †  교회약도
     환영의글
   †  교역자소개
     교회연혁
     교회행사
     교회조직
     선교활동
     주일설교
     주간소식
   †  특별집회
   †  예식안내
   †  영어예배
   †  미국장로교
 문자설교                                                
  2015년 1월 25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설교 :     이준형 목사
  본문 :     마태복음  9 : 14 - 26
오늘 본문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물론 유대인들만 위한 복음서는 아닙니다. 주로 유대인들이고 그 다음에 믿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한 많은 논쟁과 의문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관심이었던 과연 이 예수님이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인가 하는 것과 구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궁금증에 대해 명확하고 담대하게 답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마태복음의 전체적 주제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를 경험하고 보내심을 받은 분이 증거하는데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백성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으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천국 백성이 가져야할 참 믿음과 참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의 믿음의 관점과 방향성 이었습니다. 믿음에 대한 방향과 관점이 다르면 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오늘 본문 말씀은 얘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믿음의 관점은 무엇인가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땅에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옛것, 그들이 믿고 주장하는 율법에 거해서 예수님과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두 관점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여전히 그들의 믿음이 옳고 하나님을 향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비난하고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또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살펴본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정말 믿음 없는 삶을 살 때가,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믿음은 나의 과거의 경험 속에 또는 나의 지식과 이성적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믿음을 유지하거나, 내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제한 시켜 버리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스스로 영적 자만감과 포만감에 빠져서 참된 믿음에 대한 의미가 흐려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이 혹 우리 모습속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나만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대하고 믿음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자 권면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영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봅니다. 마태복음 9장 전체를 놓고 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오늘 본문만 놓고 볼 때, 제일 먼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옵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절)

이들의 화두는 금식 입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우리처럼, 또 바리새인들처럼 금식하지 않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핵심은 이렇게 표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사에 대해, 긍휼과 사랑에 대해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금식도 하지 않는 당신들 보다는 이렇게 율법을 지키며 따르려고 애쓰는 우리들과 바리새인들이, 옛것을 지키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거룩한 행위에 힘쓴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에 볼때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배부른 자들입니다.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믿음으로 포만감이 가득한 자들 입니다. 오늘 주제를 따라서 본다면, 이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 참된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입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를 따라 본다면 이들은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첫 내용이 그때에…로 시작합니다. 앞에 내용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14절 이전 내용을 잠깐 살피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왜 너희 스승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고 계시냐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시점이 어떤 시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직후 입니다. 마태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면 그의 직업이 세금 걷는 세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와 같은 세리는 그 당시에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세금을 착복해서 로마에 갖다 바치고 남는 차액으로 그들의 이익으로 삼았던 자들입니다.

같은 동족의 등을 쳐서 먹고사는 민족의 배신자 취급받던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돈은 많았겠죠. 하지만 그는 늘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를 고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보다 원수같이 생각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세리 마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제자가 되길 청하셨는데 놀라운 것은 이 마태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눈이 열리고 관점이 바뀌고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 앞에 자기가 가진 것 보다 나를 따라오지 않겠느냐는 그 초청의 말씀이 더 큰 가치로 여겨졌기에 모든 걸 다 포기하고서 주님을 쫓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돈 잘 버는 안정된 직장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왠지 모르게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기쁨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또 다른 죄인들을 초청해서 그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짐작으로 세리는 직업적 특성상 계산이 빠른 사람일 것입니다. 마태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계산해 보지 않았을까요? 어떤 고난이 올지 어떤 삶의 위기가 올지도 모르는 그 위험수를 그가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기쁨인 것입니다. 그 이유를 보니까, 지금 그의 관점이 그의 믿음이 온통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절)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이 마태와 그의 친구 세리들과 또 다른 죄인들은 이 마태라는 세리가 자기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그날이 실직하고 슬픈 날이 아니라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복된 날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으나 지금 한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삶이 변하고, 천국을 맛보고 있는 이 때가 금식하고 슬퍼하는 게 맞는 태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금식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언젠가 신랑이 빼앗길 날이 있을텐데 그때에는 금식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너희가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면 삶이 기쁨이 되고 주님을 믿는, 주님을 향한 그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어서 환경에 상관없이, 비록 내일을 알 수 없는 실업자가 되어버린 마태처럼, 비록 내 환경과 내 삶은 여전히 실패자로 패배자로 아직 무엇인가 불안한 상태이고 또 절망이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하는 천국을 소유한 자라면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기쁨을 소유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에게 지금 이 때는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쁨이 넘칠 때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먹고 마실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잘되게 해달라고 금식하지 마시고 자녀가 예수님을 멀리하려 할 때 하나님 자녀로서 권리를 포기하려고 할 때, 교회를 떠나려고 할 때, 바로 그때가 우리가 금식할 때인 것입니다. 좋은 직장 가지게 해달라고, 좋은 집 사게 해달라고 금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입니까? 내 영적인 상태가 지금 기쁨이 없을 때, 자꾸 내 심령이 메말라 갈 때, 사단이 와서 자꾸 나를 억누르려 할 때, 내가 가진 이 천국의 기쁨과 소망을 뺏아가려고 할 때, 그 때가 금식할 때 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위기 속에서 그 기쁨을, 그 천국을 뺏기지 않도록, 예수님을 내 마음에서 빼앗기지 않도록, 그 믿음과 구원의 즐거움이 도망가지 않도록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 즉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16절) 이번에는 생베조각과 낡은 옷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생베조각의 의미는 가공되지 않은 천을 말하는데,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것을 의미 합니다. 생베조각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순수한 복음이요, 천국의 복음이고 낡은 옷은 옛것을 의미합니다. 새 것을 낡은 것에 붙이게 되면 그 해어짐이 더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낡은 율법의 잣대에 덧입히면 그 의미가 왜곡 된다는 것입니다. 낡은 율법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맛볼 수 있는 이 천국은 변하지 않는 나의 생각과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원한 기쁨이 넘치는 삶을 가져다 줍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인데 계속해서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뭐 하나 보장된 것도 없지만 그 삶이 행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마태를 보니까 그가 이제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그 기쁨이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주님을 경험하지 않고 내가 소유하고 내가 쟁취한 그 무엇 때문에 영원히 행복할 것이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나의 낡은 옷에 대어 봐도 구멍난 빈자리를, 허전한 나의 심령을 채울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새 옷으로 갈아입자. 이제 그만 그 낡은 옷 벗어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생베조각을 덧잎혀서 정말 아름다운 옷으로 옷입자.’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메세지입니다. 이제 그만 나의 낡은 옷은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옷 입고 천국복음, 생베조각을 내 가슴에 붙이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가지 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7절)

그 당시에 포도주를 가죽부대에 넣어서 보관하고 또 이동할 때 사용하였는데 동물의 가죽이기 때문에 그 가죽에 기름칠을 해서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가죽이 상하거나 새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그 기름칠 한 것이 없어지고 건조해 지면 포도주의 발효작용 때문에 가죽이 터져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즉, 유통기한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새포도주의 의미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의미합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옛것, 정형화 되버린 인간이 만든 율법주의를 의미합니다.

이제 새 포도주가 왔으니 새로운 가죽부대를 찾아 보관해서 포도주도 보존되고 가죽부대도 그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새 부대는 새로운 기름을 바를 것인데 그 기름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기름입니다. 새 포도주를 계속해서 담을 수 있는 유통기한 없는 새 가죽부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예수님이 사라져 버리면, 주님의 은혜가 말라버리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이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모양만 있는 낡은 가죽부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가죽부대로 거듭나서 새로운 은혜로 기름 바르고 우리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의 포도주를 내 심령에 가득 담아 세상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해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은 자의 삶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소유한 천국을 맛보는 자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삶은 환경이나 소유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을 보세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조건과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해왔던 그 경험과 행위로 배부른 상태였기에, 그 상태로 주님께 나아갔기에, 주님을 눈으로 보고서도,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눈앞에 보고서도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이고 누가 더 불행한 사람입니까?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덜 가졌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것에 배불러 있고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절대 볼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 복음이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없어도 내 삶은 충분히 행복하고 배부른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같은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는 사람이면서도, 주님께 달려나온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는 한 관리라고 나오는데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그가 바로 회당장 야이로 입니다.

그 당시 회당장은 참 존경받고 신뢰받는 회당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랍비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리더이자 지도자였습니다. 환경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신망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살릴 수 없는 그런 처지가 된것 입니다. 그가 돈이 없었겠습니까? 인맥이 없었겠습니까? 좋은 의사 좋은 약을 다 써봤지만, 결국 그 딸을 살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저 예수님, 모든 병자들을 차별없이 대하시고 고쳐주시는 저분이야 말로 내 딸을 살리실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 하나로 달려온 것입니다. 자신이 지키고 알고 있던 옛것으로는 또, 자신의 힘으로는 그 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야이로는 그 심정이, 그 삶이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주님 앞에 나아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구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18절)
그는 지금 사랑하는 딸이 죽었으므로 그 마음이 괴로움과 아픔으로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에게 한줄기 소망이 비춘 것은 바로 생명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지옥 같은 이 삶의 현장이 천국으로 바뀔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죽은 딸이 살아만 난다면 나는 죽어도 좋겠고, 내가 좀 잘못되어도 좋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내가 저 회당장이라는 명예로운 직책을 내려놓더라도 내 딸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지옥이 천국으로 바뀌는 소망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그의 모든 환경에 굴하지 않는 담대한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많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의 무리가 있었고 그를 알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의 명예를 생각하고 지위를 생각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께 나아와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완전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엎드려 절하며 간구한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굴복한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행했던 것에 반하는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비춰질지 염려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담대함입니다.

그 순간 또 한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한 여인 입니다. 그녀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병은 당시에 문둥병환자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죄인입니다.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녀를 만지기만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에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러한 처지의 여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 앞으로 나와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려 그 집으로 가시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칠 이 한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작은 용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무리를 쫓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19절)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따라가며 속으로 계속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저 분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 이 힘없고 가엾은 여인은 부정하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고 12년 동안을 그렇게 육신의 병은 병대로 마음의 병은 병대로 깊어진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녀가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막 5:26 에 좀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녀는 지난 12년간 그녀의 삶이란 한마디로 지옥같은 삶이었습니다. 모든 재산은 다 써버렸고, 남편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다 그녀를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삶을 12년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오늘 천국을 경험케 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2절)

그녀가 병에 걸려 사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 “딸아 안심하라.”12년을 불안에 떨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부정하다며 죄인이라며 그렇게 취급받고 살아왔던 인생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통과 아픔속에서 살았던 이 불안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가장 먼저 그녀의 마음을 살피시고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시니 그 병이 즉시로 낫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지옥같던 그녀의 삶이 천국을 맛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육신의 병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병이 있을 것입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상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였지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을 주셨던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아픈 마음,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분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믿기만 하면 “내 딸아, 내 아들아, 안심하라, 오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며 그 즉시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천국의 기쁨이 우리의 심령에 넘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치유하시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거기에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3절)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24절)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를 보시고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때를 알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이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지만, 보아도 믿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엄청난 기적의 경험을 보여주시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직 천국의 기쁨을 소유하고 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습니까? 이 천국을 소유하고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도 역사하시고 주관하시는 우리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혹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오늘 이 축복의 말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일어나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나의 모든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으로 새롭게 힘입어 주님 주시는 참 평안과 영생의 기쁨을 지금 나의 불완전한 삶 속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는 복된 한 주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004-2016   kpcow.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