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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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월 18일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Where did you get to know me?)
  설교 :     서용정 목사
  본문 :     요한복음  1 : 43 - 51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대답은 다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기들은 사랑스럽습니다. 아기들의 통통한 팔과 다리는 한번 눌러보고 싶게 만듭니다. 옹알이 하는 소리는 너무 귀엽습니다. 아기들의 미소는 마음을 녹여 버립니다. 팔에 안겨 잠들 때는 참 사랑스럽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기들은 다루기가 힘든 존재라고 할 것입니다. 아기들은 목에 힘이 없기 때문에 자기 몸에 비해 큰 머리를 가누려면 옆에서 잡아 줘야합니다.

하지만 머리 중간의 숨구멍을 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아기의 울음소리보다 더 스트레스 주는 소리는 또 없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당신을 쳐다보다가 울기 시작하면 그건 더 당황스럽습니다. 아기들은 침을 흘리고 토하기도 하며 심지어 기저귀가 새면 입고 있는 말끔한 옷에다 묻히기까지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한 때 이러한 모습을 가지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복음서들은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했다고 말합니다. 동방박사들 또한 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림으로써 경배했습니다. 나이든 어르신들도 예언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안으며 “아, 너무 예쁜 아기네요.”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소년이었을 때는 예수님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목수인 아버지의 망치를 가지고 가업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결국엔 목수가 아닌 어부가 되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셨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빌립과 나다나엘이 그 중 두 명입니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위해 어른의 모습으로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삶에는 성장과 변화가 있었습니다. 주님에게도 성장이 필요했다면 제자인 우리에게도 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성탄 이야기 속의 아기의 모습으로 계속 남겨졌다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바꾼, 나사렛 출신의 제자삼는 예수님은 없었을 것입니다. 성탄절기가 끝나면 주현절이 시작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에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을 드러내심과 우리가 그 선물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성탄 장식등을 일년 내도록 켜두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축하해야 할지 압니다. 교회도 정기적으로 출석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성탄예배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일 년 내도록 등을 밝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성탄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지금 우리는 주현절을 맞이함으로 단순히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에 머물지 말고 그 분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2절)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우연히 마주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찾고자 다른 곳이 아닌 갈릴리로 떠나고자 하셨습니다. 빌립을 찾으셨을 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는 빌립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말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빌립이 예수님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 여기 어떤 분은 빌립처럼 따르는 일이 쉬웠을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나다나엘이 그랬던 것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따르는 방법은 다를지라도 예수님은 두 개인을 각각 부르셨고 둘은 그 부르심에 충직하게 따랐습니다.
2.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부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5절)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신 다음에, 다른 이들을 부르시기 위해 우리를 쓰십니다.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빌립은 나다나엘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아는 사람을 찾아가 예수님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쓰셔서 그들을 부르실 수 있음을 저는 의심하지 않지만 우리를 신뢰하고 잘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전할 때, 그들을 이끌 확율이 더 높을 거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7절)
빌립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나다나엘의 성품에 대해서 아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소외된 자들과 죄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그들의 삶을 바꾸신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처럼 성품이 좋고, 또한 모든 면에서 출중한 사람들 또한 예수님은 부르시고 더 나아가 그들을 제자로 쓰시는 것을 빌립이 상기시켜줍니다. 예수님이 창녀나 마약중독자 또는 살인자 뿐 아니라 과학자나 영화배우, 그리고 정치인들 또한 그 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전혀 뜻밖으로 들리십니까?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초대할 때 “와서 보라”라고 말합니다. 이 방법이 상대를 초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것은 전략적 초대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고 초대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을 만나야 할 모든 이유들을 열거하는 대신 직접 와서 “보는 것”에 중점을 두어 얘기합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때 어떠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교회된 우리도 나다나엘과 같은 이웃에게 다가가서 이처럼 교회로 초대 하면 어떨까요?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하며 초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초대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보게 될까요? 저는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맡은 각자의 일을 서로 존중하고, 건강한 영적 성장을 위해 양육하며, 이 모든것을 사랑안에서 행하는 교회가 될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경험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과 우리 교회가 “온전한 동행”을 한다고 느끼게되지 않을까요?

3.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쓰십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6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중대한 일을 해낼 것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현실적이기 때문이지요. 나다나엘 또한 예수님에 대해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명문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 예수란 사람은 누구지? 결혼도 하지 않고 권력도 없는 사람이 정말 우리를 위해 뭔가를 할 수나 있을까?”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나다나엘과 같이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합니다.

“우리 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에서 무슨 대단한 일이 생기겠어? 우리 같은 가정에 무슨 대단한 일이 있겠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훌륭하게 쓰실 수 있으십니다.우리는 자신에 대해 회의감을 가끔 가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쓰임 받기를 원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러 갔을 때 그의 마음 속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처음 마주 했을 때도 그에게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8절)
예수님으로 부터 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란 칭찬을 듣고서도, 이러한 질문을 하는 나다나엘이 무례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자신에 대해 아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이 놀랍지 않은데 여러분에게는 그 사실이 놀랍게 보이시나요? 혹시 무화과나무에 대한 얘기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예수님을 대하는 나다나엘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을까요?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는 무화가나무가 주는 의미를 모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에게 있어서 무화과나무는 변화점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일해 나가시는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그 분이 일하고 계심을 알 뿐입니다. 무슨 일이던 간에 예수님께서는 각 개인을 위한 특별한 일을 하십니다.

지난 5월, 저는 학교친구의 간증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하는 일마다 모든 상황이 다 안 좋게 되어지는, 삶의 그런 시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하루는 절망 가운데 끔찍한 기분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였습니다. 버스가 휴게소에 잠시 들렸을 때 어느 낯선 승객이 그의 옆자리에 앉더니 뭐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없어요.” 그 승객은 또 다시 묻더랍니다. “없습니다.”

그러고서 그 승객은 화장실을 가기위해 자리를 떠났고, 돌아 온 후 자리에 앉더니 제 친구에게 아이스크림콘을 건넸습니다. “전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요?” 그 승객은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말더랍니다. 제 친구는 그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아이스크림콘을 사주는 그 모습에서 제 친구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것이 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긴 얘기를 요약하자면, 결국엔 그 아이스크림콘이 제 친구가 목사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제 친구는 그 낯선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 그 아이스크림콘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대한 얘기도 그리고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조차도 못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낯선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역할을 진심으로 존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수요예배나 수요성경공부에 참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성실히 섬긴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그 낯선 사람의 아이스크림콘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삶의 방식은 하나의 잘 정립된 이론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이든, 어떠한 일이든 사람들을 자신에게 부르시기 위해서 다 쓰십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며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와서 보라”는 초대의 말도 듣습니다. 우리가 와서 영적인 성장을 위한 양육을 받을 때,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예수님께 드린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는 아마 놀라게 될 것 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무화가나무가 무엇이던 간에, 예수님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그 곳에서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실 일을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놀란 채로 그대로 있지 말도록 합시다. 그 분을 따라 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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