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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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2월 7일            진정한 위로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이사야  40 : 1 - 11
열심히 하면서 정죄와 비판이 난무하는 교회를 은혜로운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가 있는 교회를 사람들은 은혜로운 교회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임으로 하나님께 맡겼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과 교제가운데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위로하기보다는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수하게 되고,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족과 한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절망하며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 인간이 교만해지는 것도, 자랑하는 것도, 남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는 것도, 이 고민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이웃을 정죄하며, 업신여기는 것도 다 그 고민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들입니다. 인간은 모두 위로가 필요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오늘 본문은 책망과 심판의 경고에서, 구원과 축복으로 전환되는 전환점이 되는 내용입니다. 포로생활로 지쳐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혀 희망이 없는 영원한 고난같이 보이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위로가 필요하기에 이사야를 통하여 위로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사실을 진실하게 알려 주어야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6,7절) 진정한 위로의 출발점은 진실을 알려주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은 위로자입니다. 진리를 알려주고 실체를 제대로 알려줍니다. 그러나 사탄은 거짓의 영으로 속이고, 미혹하게 만들어갑니다. 진짜 같은 거짓으로 속이며 다가옵니다. 잠깐은 위로가 되는 것 같으나 영원한 절망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인생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유혹합니다. 인생이 자기 자신의 삶을 주관할 수 있는 것처럼 유혹하여 나의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자신의 것인 줄 유혹하여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인생의 실체를 알아야하고 알려 주는 데서 시작됩니다. 인생을 꽃과 풀 혹은 안개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은 이 세상에서 시들어야 하고, 사라져 가야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위로하시는 그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실체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일치와 모순 같아 보입니다. 심판의 징계와 구원의 사랑이 동시에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있으며 질서와 자유가 동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부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기에 죄의 심판을 말씀하신 후에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의의 완성이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질서 안에서 자유가 방종이 아닌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전해야 부활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말해야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빈 무덤과 부활이 있습니다. 진실을 외면한 위로는 결국에는 엄청난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먼저 인간의 실체를 외쳐야 합니다. 육체는 장막 집과 같이 무너지게 됩니다.

모든 인간적인 아름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즉 여호와의 기운이 있는 동안에 꽃과 풀로 있게 됩니다. 결국에는 마르고 시들게 됩니다. 이때에 가지게 되는 것은 허무함, 두려움, 절망과 좌절감입니다. 다윗이 고난을 극복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며 고난 가운데 위로를 받아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잠간의 아름다움과 사라질 영화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

2. 준비하도록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3-5절) 준비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준비는 소망이 있을 때에 하게 됩니다. 소망이 없으면 준비하지 않게 됩니다. “해 봤자 소용이 없는 데 해서 뭐해” “쓸데없는 짓이야” 이런 곳에서는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을 예표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여 소망을 가지려면 신앙인들이 해야 하는 준비이기도 합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심의 소망을 가졌기에 준비를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천국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의 길이 아니라 여호와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소망,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가질 때만이 길을 예비하게 됩니다. 이 길은 자기 자신이 해야 하는 길입니다. 광야와 사막과 같은 인생길에서 길을 예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능력과 지혜 그리고 사랑과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평탄하게 길을 고르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회개하며 거룩함으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먼저 회개해야 함을 알려주어야 진정한 위로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하나님에 대하여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죄인임을 자기 자신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별되어야 함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구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과의 구별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과 세상의 마음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는 타락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자기 자신과 세상의 가치에서 떠나는 거룩함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세상과 같이 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회개와 거룩함을 가지도록 격려하는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이 겸손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감으로 이웃에게 준비하도록 격려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을 보게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9절) “하나님을 보라 하라” 진정한 위로는 교회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위로는 사역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며 사역자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보게 해야 합니다. 심판의 하나님만을 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보며 만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기쁨과 평안을 가져오는 소식을 듣고 보게 해야 합니다. 기쁨과 평안을 가져오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총 즉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듣고 보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할 때에 마음에 위로를 받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내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 내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을 하도록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내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인생이 무엇인지 사실을 진실하게 전하는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풀과 꽃과 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 회개하고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희망이 있기에 준비하자고 권면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으로 천국에 가서 영생을 산다고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를 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주안에서 복음을 알게 하는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이웃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일입니다. 주안에서 복음을 알게 하는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이웃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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