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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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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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0월 26일            Once Upon a Time (옛날 옛적에)
  설교 :     양희성 목사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 : 1 - 8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의 얘기 듣기를 즐거워합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의 책, ‘권력의 조건’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관중의 규모가 적던 많던,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 매료시키는 재주가 있었다고 서술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링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링컨 가까이 옹기종기 모여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인 채, 링컨이 그려내는 이야기속의 세상으로 빠져들기를 원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치 ‘별에서 온 그대’ 같은 요즘 드라마가 우리를 현실이 아닌 드라마 속 세상으로 빠져들게 하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이야기 속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인간의 삶에 심장박동과도 같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야기는 영혼을 가진 역사와도 같습니다. 그럼, 제가 몇 가지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옛날 옛적에, 하나님께서 조화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로 그 완벽한 세상은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있기 전, 그 곳의 규칙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그곳의 창조물들을 위해 살아라” 슬프게도 인간이 죄를 지은 후, 그 규칙들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첫째로 자신을 위해 살아라” 그 결과로 하나님과 이웃들, 그리고 창조물들은 두번째로 밀려나고 ‘나 자신’이 첫째가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인류사는 각자가 각자의 태양계의 태양이 된 이야기로 전개되었습니다. 즉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속한 사회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물질주의가 만연한 곳으로 변해갔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기를 시작했는데, 바로 남들보다 뛰어나고 남들보다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함으로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왜곡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일의 결과로 세상이란 드라마 속에서 ‘Mr. & Ms. 아이폰’이란 주연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스토커들 처럼 우리는 이런 물건들에 강박증을 가지게 되고 그로인해 ‘Mr. & Ms. 아이폰’이 하는 행동들을 다 따라하려 합니다. ‘Mr. & Ms. 아이폰’을 가져야만 합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우리 이웃의 나이든 어르신들을 돌아보거나, 세계의 기후변화에 대해 관심가지고 알려고 한다거나, 바울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일보다도 그 아이폰 드라마의 전개를 더 기대합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너무나도 멀리 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데까지 와버렸습니다. 우리는 과잉된 자본주의 사회의 덫에 걸린 채, 시장경제를 채우는 상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나의 이익을 위해 쓰일 상품이나 도구, 그리고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좀 더 가치 있게 해줄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예로, 뉴욕타임즈의 어느 기사에서 구세웅 기자는 한국의 교육제도는 건강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과하게 몰아 부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뉴욕타임즈: “South Korea’s Education System Hurts Students,” Aug. 1, 2014) 이것은 바로 부모가 그 아이들을 볼 때, 자신의 가족을 더 가치 있게 할 미래의 “투자”가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이 결혼관에도 적용되는데 왜냐하면 결혼을 경제적 교환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의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자유나, 개인의 선택 또는 행복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품화되고 보여주기 위함과 절대적 순종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조차도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지 않고 이득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부모님 여러분, 저는 이것이 여러분의 잘못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이 제도의 문제이지 부모님의 문제가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4절)

“남보다 더 잘되고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우리의 가치를 높여줌으로 기쁨을 안겨줄 것이라고 하는 세상의 말과는 반대로, 그것은 우리를 깊은 슬픔으로 이끌었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왜곡되어진 세상에서 사람은 결코 만족되어질 수 없고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도록 만듭니다.

결국에 우리는 부서진 채로 남겨졌습니다. 하지만 옛날 옛적,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서진 세상에 오셨고 새로운 법칙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법칙은, 우리 존재가 “가치”를 넘어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나누신 이 이야기의 능력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복음, 즉 “좋은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 보듯이, 고난과 능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강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바울이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복음은 단지 “좋은 소식”이 아닌 “놀라운 소식”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이 어떤 것인지 단서를 보여줍니다 열정에 가득찬 바울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7-8절)”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곧 깊은 돌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부서진 세상에 오셨고, “유모가 자기 자녀를 돌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으신 것은 우리 또한, 우리의 삶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데전2:7, 요3:16) 예수님은 우리들을 깊게 돌보십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걸린 팸이란 간호사의 이야기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알지도 못하는 어느 환자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건강은 옆으로 재쳐두었습니다. 그녀는 환자를 먹이고 또 환자가 토해 낸 것, 소변, 그리고 설사로 더렵혀진 환자복을 갈아입히면서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 의료진 중 한 간호사가 말하기를, “우리에겐 어느 누구도 하려고 하지않는 그런 희생을 기꺼이 감당하는 영웅들이 있습니다…저는 팸 간호사가 기회가 되면 또다시 그 환자를 돌볼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뉴욕타임즈)” 그녀는 복음의 법칙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깊게 돌보았습니다. 그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팸 간호사는 위험이 있음을 알고도 그것을 감수했지만, 세상은 그녀가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린드발 목사님의 표현을 빌려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은 외롭습니다. 그 세상은 이기적이고, 냉소적이며 적대적입니다.” (Piece of sermon given by Rev. Lindvall at Brick Presbyterian Church) 경쟁적이고 물질만능적인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음이라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할 필요에 처했습니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우리 모두는 복음의 이야기 속으로 계속해서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깊은 돌봄의 이야기로 말입니다.

사람들이 친밀함이 있는 공동체 안으로 초대되어지는 이야기, 마음씨 넉넉한 사람들의 이야기, 정직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위와 같은 출처) 이 복음 이야기의 아름다운 결말은 ‘회복되어짐’에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습대로 다시 회복되어졌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삶에서 얼마나 잘하거나 많이 소유했는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과 이웃을 상품이나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형제들과 자매들로 보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기 내려놓음”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8절) 이것은 마치 부모의 자녀양육과도 같습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손해 보더라도 자녀들에게 내어줍니다. 그 어떤 부모도 자기 자녀를 돌보는 것에 대한 수익을 얻지는 않지만 부모는 자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돌보게 됩니다.

얼마전 부모님께서 저의 생일선물로 한국에서 쿠키를 보내오셨습니다. 제 생각엔 부모님이 저를 평생 어린아이로 보실 듯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쿠키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비용이 최소, 쿠키가격의 2배나 아니면 3배 정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 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단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고,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당신을 더 사랑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좌우, 앞 뒤에 있는 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는 성도들이 됩시다. 우리가 서로를 볼 때에,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형제와 자매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저의 형제자매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 자매라고 서로 고백하신 것 위에, 이익을 계산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손해”를 본다 할찌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합시다. 팸 간호사가 환자에게 한것 처럼, 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한 것처럼, 그리고 주님께서 이 부서진 세상에 오셔서 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깊게 돌보도록 합시다. 비록 거기에 큰 댓가가 따르더라도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느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은 바로 가장 멋진 이야기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옛날 옛적, 2014년 10월 26일에, 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교인들은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살 것인지 한 가지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깊게 돌보는 것과, 하나님과 이웃을 깊게 돌보는 것 중 하나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이야기의 삶을 선택하기를 기도하고 소망합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시길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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