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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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9월 28일            예수님의 권세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마태복음  21 : 23 - 32
여러분들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저도 학문을 잠시 연구할 시절, 지도 교수님의 심부름을 다닐 때에 느낀 것이 있습니다. 대하는 사람들이 저를 만날 때에 지도 교수님을 만나는 것 같이 대해 줍니다. 함부로 하지 않고, 정중하게,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통해 지도교수의 뜻을 파악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실감하는 것이 있습니다. 심부름을 보낸 자, 임무를 부여한 자의 권세를 실감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심부름을 하는 경우에 특히 그 사랑의 나눔을 대신 실감하게 됩니다. 받은 사랑의 은혜를 사랑을 베풀어준 자의 뜻에 따라 그 사랑을 전하는 기쁨이 사용됨의 기쁨으로 더욱 충만하게 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음미하며 나누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시고 역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25절) 그들이 하늘로 부터 라고 대답하면 안 믿는 것이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부터라고 대답하면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있기에 두려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예화를 들려주십니다. 두 아들 예화와 세리와 창녀의 예화입니다. 아버지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첫째 아들은 가겠다고 하면서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다고 하다가 뉘우치고 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뉘우치지 않고 믿지 아니했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뉘우치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대사, 편지, 도구 등으로 표현됩니다. 이제는 세상에 속하여 자기 자신을 홍보하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자기 자신의 이념과 가치의 대사가 되는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과 사역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는 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봅니다.

1. 회개하는 자가 누립니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30절) “뉘우치고 갔으니” 회개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권세를 누리면서 나누게 됩니다.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의 차이는 뉘우침입니다. 아버지의 요청은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28절)는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위선의 특징은 진짜와 같은 가짜입니다. 아버지 앞에 의로운 것 같으나, 아버지를 속이는 불의를 행합니다.

작은 아들은 솔직한 마음을 표하였지만 잘못되었음을 뉘우치고 행합니다. 아버지 앞에 불의한 것 같으나, 실질적으로는 의를 행합니다. 회개가 없는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이 볼 때에 의로워 보입니다. 자기 자신들도 자기도취에 의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위선자들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심판하실 분은 백성이 아니요, 자기 자신이 아니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넘어지기 쉬운 함정은 자기도취와 인간도취입니다. 즉 인기에 취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도취와 인간도취는 꾸미는 것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중심은 변하지 아니하면서 겉만 변하기에 영혼의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겉은 새롭게 꾸밀 수 있지만 속은 새롭게 꾸밀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기 자신이 속에 손을 대는 순간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직 속은 하나님께서 손 대주셔야 합니다. 마치 의사만이 몸 안을 치유해줄 수 있듯이 의원되신 주님만이 새롭게 해 주실 수 있기에 주님께 맡기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때에 영혼의 치유가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주님에게 가서 진실 된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 권세를 가질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옛 일로 인하여 죄인이라고 오해를 받고 있지만 속은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침으로 주님의 용서의 은총을 아는 것이 치유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며 전할 수 있는 길은 자기 자신을 죄를 회개하는 자만의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회개가 없는 사역 속에는 예수님의 권세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회개가 없는 사역 속에는 자기 자신만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추구하는 가치의 심부름꾼이 되는 삶의 결말을 아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품게 됩니다.

2. 순종하는 자가 누립니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절) 큰소리치며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순종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준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소리 없는 사랑의 섬김으로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곳에 간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그러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 모세의 순종도 그러합니다. “이제 가라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출 4:19,20) 오늘 날 신앙인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러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자는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순종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도취에 빠져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고 착각하면서 결국에는 자기 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과 같이 순종하는 척을 하면서 실제로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같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그리고 우리와 같이 순종하는 척을 하면서 실제로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순종하는 척하는 것과 실제로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권을 가질 수 없는 피조물임을 알 때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심판자가 될 수 없는 피조물임을 알 때 이웃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아는 자는 이웃의 무지와 무능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대항하였던 자기 자신을 자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과 자비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황이 너무 존경하여 자기 이름을 프란시스코로 부르게 한 것입니다. 아시스의 성프란시스코에게 어떤 동료 수사가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용모가 뛰어나지 아니하고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며 따르며 배우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대합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시는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시고자 뜻하셨기 때문이라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보고 계시는 데, 가장 거룩한 눈으로 죄인 중에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죄인일 수 없고, 이 보다 더 자격이 없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 그 분의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를 택하셨다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으실 수 없기에 나를 택하셨고,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과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으로 교만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고 미천한 나를 택하셨다오” 성프란시스코는 순종의 축복을 알고 있었습니다.

순종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경험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약속을 경험하는 삶,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이며 신앙인인 어거스틴도 진실한 신앙인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길은 첫째도 순종, 둘째도 순종, 셋째도 순종이라 말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노력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권세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믿는 자가 누립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2절) 세례 요한이 회개를 통한 천국의 복음을 외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종은 이해와 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이해시켜주심으로 누리며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취에 빠진 영혼은 하나님의 사인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생각에 빠진 영혼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것에 절대화를 두는 영혼이 복음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기 전에 자격을 따지거나, 조건을 따지고, 실력을 따집니다. 이것저것 핑계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지 말고,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백하고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임, 예수님의 대사가 되는 것임, 예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 권세입니다.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자녀 삼아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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