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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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9월 21일            복음에 합당한 생활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빌립보서  1 : 21 - 30
올해 표어를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삶”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인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시작한 올해도 이제 하반기에 접어듭니다.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때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 점검을 하지 않고 살아가다가는 세월을 허비하게 되거나 도리어 주신 것으로 타락하는 경우들이 흔하게 됩니다.

고난의 현장, 문제의 현장, 역경의 현장, 갈등의 현장, 억울함의 현장 등에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지를 살펴봅니다.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때에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유럽을 향한 최초의 전도지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사울의 옥중 생활을 돕도록 한 교회이기도 합니다. 밖으로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들의 핍박의 소리가 들려오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로 인한 신앙의 혼돈의 유혹과 세상의 유혹이 극심하고 교회 내에는 분란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빌립보교회를 향해 감옥에서 사도바울이 삶의 의의를 이야기하는 내용이 본장입니다. 먼저 12-18절에 자기 자신이 감옥에 있는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14절) 옥중에서 갇혀있으나 기쁨과 자유함을 누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하루 빨리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고 싶지만 아직 사는 이유를 22-26절에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6절) 그런 후에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때에 고난이 오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 어떤 삶인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27절) 한 마음, 한 뜻이 되면 자연스럽게 한 몸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독특한 각자의 마음이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을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고 계속될 수 없습니다. 오직 변하지 않는 한 곳을 같이 바라보며 서로 함께하는 곳에만 가능합니다. 하나의 유기체는 연결이 되어 있어야 만이 그 존재의 의미와 보람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연결된 각 부분, 부분이 같은 것이 없음이 특징입니다. 비행기를 보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지만 부분 부분은 모양이 다르고 기능이 다릅니다. 그 연결된 모든 것이 기능을 다 할 때에 비행기는 날게 됩니다. 그러나 여행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은 기체결함으로 결항하는 경우입니다. 그 연결에 문제가 생기면 비행기는 결항을 하게 됩니다.

조그만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는 연결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출발이 허락되지 않고 날지를 못하고 목적지에 제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름이 하나로 연결될 때에 엄청난 힘을 얻을 수가 있게 됩니다. 다름은 역할과 기능의 다름을 의미합니다. 다름은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필요함은 귀중함을 의미합니다. 몸에는 각각 다른 많은 지체들이 연결되어 이루어집니다. 연결되지 않은 지체는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움직이지 못하면 사용됨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신앙인에게 하나의 경험은 가정과 교회에서 시작됩니다. 교회를 지체들과 한 몸으로 비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교회는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교인들의 삶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됩니다. 교인들이 잘못하면 예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나아가는 지체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의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지체의 각각의 은사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다른 하나의 경험은 부부를 출발점으로 하는 가정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새로운 관계와 가치로 연결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 속에만 있었던 자녀가 이제 배우자와 함께하는 관계로의 전환된 새로운 관계임을 강조하여 새롭게 정립하여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효라고 생각하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만 머물 때에 부부관계는 결국에는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불행은 효를 하려는 것이 불효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안타까운 일이 됩니다. 제가 사는 6층에 이세 한인 젊은이가 미국인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3살짜리 인형같이 예쁜 엘리스라는 딸과 1살짜리 잘 생긴 그레이슨이라는 아들을 둔 엄마입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만날 때마다 친근하게 이야기를 해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자기 자신이 결혼할 때에 반대가 심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요청에 이해를 할 수가 없더랍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시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을 가지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연결점이 세상의 가치가 아닌 새로운 가치여야 합니다. 연결을 시켜주는 힘은 세대를 본받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여야 합니다. 그 가치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인간적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연결의 표현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에 합당한 삶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어 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려는 한 뜻을 가지고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2.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삶입니다.

연결의 구체성을 살펴봅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27절) 협력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연결된 지체의 역할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역할과 사명의 중요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지체의 역할과 사명의 중요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상대방의 존중과 협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할 때에 이웃의 역할을 무시하고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면서 존중하고 협력하게 됩니다.

이것은 함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함께하는 것은 동고동락(同苦同樂)을 의미합니다. 즐거움도 함께하고 고생도 함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29절) 같이 고생하고 같이 즐거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지체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지체들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됩니다. 지체들이 힘들 때에 같이 힘들어하고, 지체들이 잘될 때에 자기 자신이 잘된 것같이 기뻐하게 됩니다.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고, 질투하지 않고 함께합니다.

3. 고난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삶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28절) 한마음, 한 뜻, 한 몸이 되어 동고동락하는 데에 대적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거짓의 영, 유혹의 영, 어둠의 영이라 불리는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대적 자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난을 당합니다. 이를 통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며 핍박과 갈등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이때에 다가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수치에 대한 공포, 억울함이 영원할 것 같은 공포, 이러한 공포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두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있을 때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것도 사랑의 확신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이러한 곳에 이길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28절) 고난은 대적 자에게는 멸망의 증거입니다. 이 대적의 죄를 하나님은 물으시고 결국에는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고난의 대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긴 신앙인은 구원의 증거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증거가 됩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30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확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인정하며 존귀하게 여기며 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욕망, 뜻, 추구하는 가치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워나갈 때에 진실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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