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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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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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3일            내게 가져오라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마태복음  14 : 13 - 21
지금의 세계는 첨단 기술이 개발되어 편리해진 세상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불편해져 가고 스트레스는 심해져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외딴 곳, 멀리 있더라도 소식이 가능합니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어 전쟁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세계는 온통 화약고입니다. 질병도 예방하고 치료제들을 개발하여 살만하다고 하는 데, 신종 바이러스 에볼라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미 700명 이상이 죽어가며 세계보건기구와 세계가 비상이 걸려있습니다.

치료제가 없고 치사율이 90%이기에 걱정들이 대단합니다. 유엔 보건기구에서는 서아프리카 3개국 국경에 검문소를 세우고 격리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아갈 수록 더욱 더 힘든 고난이 다가옵니다. 자살률, 이혼율은 점점 높아져가고, 부패와 타락은 더욱 더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한 예수님의 이적의 내용입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이적의 사건은 오늘의 세계를 살아갈 지혜를 전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과 조건을 열거해봅니다. 큰 무리가 빈들에 모여 있고 날이 저물어 갑니다. 배가 고프지만 먹을 것이 없었고 오직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무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결과는 문제의 해결만이 아니라 엄청난 풍성함을 누리면서 무엇보다도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경험함으로 아는 축복을 누립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20, 21절) 오병이어의 기적!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18,19절) 먼저 신비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청, 지시, 명령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예수님은 그냥 무에서 배고픔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허기를 느끼지 않도록 풍성해져라”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영양이 섭취되어라” 인간에게 요청하는 일이 없이도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시와 명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지시와 명령 혹은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도 순종을 통한 성취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시를 받은 자의 순종에서 기적은 시작됩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그것을 예수님께 가져오는 것은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홍해 앞에 선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미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모세가 홍해를 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는 말씀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해야 할 일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순종의 장애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자기 자신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자기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9)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라는 빌립의 의문입니다.

비용이 있다 하더라도 구입할 수 있는 장소와 양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는 믿음의 측정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측정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에 자기 이성과 경험에 의한 판단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에 자기 자신의 이해 안에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문화 안에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는 따를 수가 없게 됩니다. 이성적으로는 말로 안 되는 지시이며, 이해할 수없는 지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순종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됩니다.

순종의 요구는 사랑의 측정입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책임의 측정입니다. 큰 무리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은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사랑을 전하기 원합니다. 이성과 문화 등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책임입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은 모든 것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의 체면, 자기 지신의 이성, 자기 자신의 경험은 상관이 없습니다.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는 마음이 사랑의 책임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영혼들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함께 모아 그 사랑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생명의 양식을 줄 책임을 잊어버릴 때 교회는 위치와 사명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교인이 교회를 통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려 할 때에 신앙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직이 교회를 통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려 할 때에 신앙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통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려 할 때에 신앙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한 마음으로 모아서 세상에 그 사랑을 내 보낼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2. 희생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가져가는 순종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한 희생인 자기희생입니다. 어떤 아이(요 6:9)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를 주면 그 어린 아이는 같이 배고프게 됩니다. 성경은 모든 것의 원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물질관이 바로 될 때에 내 놓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8) 물고기 2마리는 멸치같이 아주 작은 생선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예수님에게로 가져오라 말씀하십니다.

먼저 양보다 질, 행위보다 마음의 중심을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적고 작은 것이라도 부유한 사람에게 별 것 아닐지라도 가난한 자에게는 생명자체 일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예를 들어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가 아들과 마지막 먹고 죽으려고 남겨 놓은 것을 내어 놓으라고 말합니다.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왕상 17:12) 평상시에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일 수 있는 물질이지만 이것은 가난한 과부 집 모자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가루 한 웅큼과 병에 조금 남은 기름!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라는 사람이 떡을 만들어 자신이 먹겠다고 가져오라 합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순종합니다. 엘리야에 대한 믿음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16) 사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에서도 가능합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1, 32)

어느 스코틀랜드의 시골에 놀라온 도시 소년이 작은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가 발에 쥐가 나서 죽을 지경에 처한 농부의 아들이 발견하고 구해 줍니다. 이 도시 소년의 부모는 아들을 구해준 농부의 아들이 너무 고마워 공부를 시켜주게 됩니다. 이 농부의 아들은 의학을 공부하여 1928년에 페니실린을 발명하게 됩니다. 이 농부의 아들이 1945년 노벨상 수상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물에서 구조를 받았던 도시 소년도 장성하여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이 도시 소년은 장성하여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과 정상회담을 한 후에 폐렴에 걸려 입원하게 되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런데 페니실린의 도움을 받아 회복됩니다. 이 도시 소년이 윈스턴 처칠입니다. 자기 자신이 죽음의 고비에서 건져준 그 은인이 다시 생명을 살리게 됩니다. 그것은 은혜의 빚진 자로 감사하는 마음을 시골 소년을 공부시켜주는 것으로 표할 때에 나타난 열매입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은 때로는 세상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3. 주께로 가야합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20, 21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나 경험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남자 장정만 5천명,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합하면 엄청난 숫자가 될 것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 그것도 부스러기가 아니라 온전한 빵과 물고기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적이라고 말하고, 신앙인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경험하려면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현대교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경험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 먼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이 아닌 교회 자체의 지시에 순종합니다.

교회 성장, 교회의 우상화가 되어진 곳에서는 교회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주님이 아닌 사역자의 지시에 순종합니다. 사역자의 능력만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경험하지 못함으로 파벌과 분쟁이 시작됩니다. 때로는 주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뜻에 순종합니다. 신앙이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 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시는 것이 여러분들의 삶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의 초대는 이렇게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삶입니다. 복음의 사역자로 희생과 겸손과 자비와 긍휼한 마음 즉 섬기는 삶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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