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 : 8)
   †  처음으로
   †  교회안내
   †  예배안내
   †  교회약도
     환영의글
   †  교역자소개
     교회연혁
     교회행사
     교회조직
     선교활동
     주일설교
     주간소식
   †  특별집회
   †  예식안내
   †  영어예배
   †  미국장로교
 문자설교                                                
  2014년 6월 22일            성도의 고난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마태복음  10 : 24 - 39
성도가 된 후에 즐겁고 평안한 삶만이 이루어질 것 같았는데,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갈등이 찾아옵니다.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전하려 할 때에 어려운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벗하여 살아갈 때에는 찾아오지 않던 갈등, 핍박, 어려움 등입니다. 믿음의 갈등, 믿음으로 인한 핍박 등이 다가옵니다. 보이는 사역의 대표적인 예인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에다 도와줄 줄 알았는데, 방해하는 사람,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추측하면서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에 공천하면 사양하고, 부탁하면 거절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피는 믿음의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당연히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며 이 고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24,25절) 스승이며, 상전 그리고 집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았을 때에 바리새인들에 의해 억울한 소리를 들으며 사역의 방해를 받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몰아냈다는 조롱과 모욕을 받았던 예를 들어 주시면서 제자이며 종이고 집 사람들인 제자들의 고난은 당연히 다가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되는 예수님도 이러한 고난을 받았는데 성도인 우리들도 당연히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먼저 알고 고난을 적극적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게 임하면 임할수록 이에 대한 도전은 심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악한 세대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고난가운데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을 이기는 길을 오늘 예수님은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극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원어로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무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라 부름을 받습니다.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제자라 부름을 받습니다.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령을 받은 자라 부름을 받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용서의 은총을 받은 무리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로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세상의 가치로부터 도전을 받게 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려고 하면 수많은 방해와 도전이 핍박으로 다가옵니다. 그것도 때로는 성도들끼리도, 때로는 동역 자끼리도, 억울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오해로 인하여 방해를 받기도합니다. 성도에게 이런 고난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성도의 두려움에는 죽음이나 더욱 힘들어질 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더 큰 두려움은 자기 자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절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고난과 도전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자격이나 능력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기 한계의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며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옳고 그름을 드러나게 하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26절)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억울함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중심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대적 자들이 숨기고 감춘 것들을 드러나며 알게 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진실하고 명백하게 알려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27절) 가식이나 위선으로 해서는 안 됨을 의미합니다. 진실되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진실하고 명백하게 삶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분명히 보고 듣게 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삶이 복음을 전하는 삶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 방법이,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그리고 고난이 그로 인한 고난인지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며 인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절)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며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입니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삶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심판의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28,29절) 심판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심판자이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도 주관하시는 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가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35-37절) 마치 예수님이 불화를 조장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상한 것은 화목과 평강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인간적 사랑 뒤에 놓으면 그 사랑은 결국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설 때만이 진정한 화평과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은 사랑이 인간적 사랑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입니다. 사람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될 때만이 영생의 기쁨과 복음의 능력을 은혜로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인내하며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화평이 아니라 내적인 화평입니다. 확증된 사랑인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모든 삶의 현장이 비록 고난의 현장같이 보이지만 그 현장을 통하여 결국에는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도 인간적 관계를 우선순위에 놓을 때에 신앙은 죽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을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루마니아 공산정권 하에서 푸로레스코 목사님의 아들의 믿음을 통하여 이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1세 먹은 아들을 고문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집니다. 예수를 믿느냐는 질문에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들의 고통을 눈으로 볼 수가 없기에 배교를 하려 할 때에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배신자가 된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 않아요”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점검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고난을 이겨나갈 때에 승리가 있게 됩니다.

3.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가운데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은총이 복음이기에 우선 순위는 그 사랑을 바라보며 자기 부인 즉 자기 희생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8, 39절)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부인하고,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을 따를 때에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낮추며 희생함으로 인내하며 고난을 이겨 나갑니다.

요셉이 채색 옷이 벗겨지고,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도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보디발의 집을 잘 섬김: 결국에는 지배인과 같은 가정 총무가 됩니다. 고난을 한탄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됨을 부인하고 충성된 종이 됩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임, 자기 자신이 보디발의 집에 지배인과 같은 가정 총무였음을 버리고 감옥의 간수를 도와 죄수들을 섬기는 일에 충성하게 됩니다.
성도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 속에서 인내의 섬김으로 나아갈 때에 극복하며, 그 고난이 축복이 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고난이 다가 올 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삶인지를 점검하며 주님을 따라갈 때에 고난이 축복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 2004-2016   kpcow.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