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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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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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설교
  2014년 4월 13일            여호와의 문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시편  118 : 19 - 29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한 대속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광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 그러나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은 고난의 문에, 죽음의 문에, 대속의 문에 들어가심을 의미함에도 백성들은 승리의 문, 개선문같이 생각하며 환호합니다.

이제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당되어 유대민족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구원을 소망하며 호산나를 부릅니다. 물론 후일에 백성들의 생각과는 다른 의미에서 승리의 문, 영생의 문, 사랑의 문, 구원의 문인 개선문임을 알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게이트 번호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항의 전광판을 바라보며 게이트를 확인하여 찾아가서 그 문을 통과해서 비행기를 탑니다. 그 게이트에는 도착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 보아야 합니다. 런던이 영국에도 있고, 캐나다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게이트를 통과하느냐에 따라 타는 비행기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가 도착하는 곳이 다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주석학자들이 다윗이라 생각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올라가며 자주 사용하던 하나님께 올리는 송축시입니다. 작자가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 있음은 확실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절) “의의 문, 여호와의 문”은 성전 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문은 열고 들어가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고 들으며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문은 예수님의 초청, 주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 예수님은 그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보이지만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 13,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여호와의 문으로 들어가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지를 본문을 통해 알아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주 안에 거할 때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에 어떤 경험을 누리는 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의 기쁨을 누립니다.
여호와의 문은 의의 문으로 의인들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19,20절) 죄인들은 그 문을 들어가지 못함을 의미하며 오직 의인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 가리도다” 의인은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인 선과 악의 개념에서의 행위의 의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가는 사람 자체의 삶이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삶을 살아가는 의로움으로 그 문을 들어간다면 아무도 들어갈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물들은 인생이었지만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만이 들어 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회개와 용서의 은총을 통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자만이 들어 갈 수 있는 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죄의 용서의 확신만이 그 문을 들어가는 담력을 얻게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격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격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이 자격입니다. 시편기자는 오늘 확신에 차서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6절) 여호와가 자기 자신의 편임은 용서의 확신에서 나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선언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구하는 자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확신은 구원의 확신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영생의 확신, 천국을 소망하는 자의 기쁨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21절) 그 구원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날, 여호와의 문 즉 주 안에 거함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실감하는 그 날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문에 들어온 의미를 실감하는 그 날입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24절)

2. 변화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원의 확신, 사랑의 확신은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던 삶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확신함으로 두려울 것이 없기에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예수님의 삶이 이를 보여줍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배척을 받는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세주로 교회의 초석이 되십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22절) 예수님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본문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존귀해지려는 존재에서 존귀한 존재로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하여 이미 존귀한 자가 되어 있음을 알기에 피조물로부터 존귀한 존재임을 인정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의 사랑받은 복 있는 자임을 알기에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도리어 그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됩니다.

사랑을 받고 존귀를 받기 위해 인기에 연연하고, 체면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롭게 보이려고 위선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보이려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인정받으려고 하는 삶 속에서 비교하며 질투하고 시기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경쟁하기 위해 자기 사역에 게으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사랑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갑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조롱과 멸시를 당해도 업신여김을 받아도 인내의 사랑을 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낮아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어도 이를 기쁘게 여깁니다. 자기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기 만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던 자기 자신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인생들에 의해 버려지는 것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이 존귀하게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경험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바울이 세상이 귀히 여긴다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음도 예수님의 문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진정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사역을 통하여 신비한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세상이 할 수 없는 기이함을 자기 자신의 삶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문 즉 의의 문을 들어간 자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축복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을 살아가는 자만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어리석게 보이고, 바보같이 보입니다.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의 삶도 바보같이 살아간 분입니다. 관도 없이 사과궤짝으로 만든 곳에 뉘여 발이 나온 상태로 감옥에서 나온 시신을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어리석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 훗날 아들은 장로가 되어 진리를 알 때에 그 삶이 얼마나 귀한 삶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자존심도 없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데미앙은 돌보던 문둥병자들과 같이 문둥병에 걸려서 죽어가면서 도리어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모든 믿음의 본을 보여준 분들이 한결같이 알려준 것은 바보같이 살았으나 실속이 있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저주와 죽음 그리고 절망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축복과 영생 그리고 소망의 상징이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23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절)

여러분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신의 문인지, 여호와의 문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 안에서 생각하는 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결과는 생명과 생명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은혜를 아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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