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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 11일            다리 놓는 사람들
설교 :     최훈진 목사 [현 덴버 한인중부장로교회 노회지정 목사]
본문 :     마가복음  14 : 3 - 9
마가복음 14장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 여인을 추천하시면서 그를“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상”으로 극찬하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막14:9)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추천하시는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우리도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여인은 값진 나드 향유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가치는 300 데나리온 즉 300일의 임금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처녀들은 결혼을 위해 귀한 향유를 옥합에 넣어 준비했습니다. 그 옥합은 향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봉해져 있었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병을 깨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깨어 그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귀한 향유를 예수께 부었을 때 계산 빠른 제자들은 값진 향수를 쓸데없이 낭비한다고 그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오히려 칭찬하셨습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미리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낭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가장 근본적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향유의 목적은 낭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향유를 돈으로만 계산했습니다. 합리성과 효율성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향유를 팔아 돈을 가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금이나 은이 더 투자용으로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향유는 투자용이 아니라 쓰기위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값진 향유가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쓰여져야 됨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낭비라면 값진 낭비, 거룩한 낭비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런 낭비를 해 봄직합니다.

왜 우리가 존재하느냐를 돈으로 계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여지느냐로 생각한다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당 얼마짜리 인생이냐,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가 존재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쓰여지느냐가 존재 목적임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쓰여지느냐가 우리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이 아까운 시간에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이 시간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일을 한다면 돈을 더 벌 수가 있는데, 여러분은 거룩한 낭비를 선택하신 분들입니다. 제자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시간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면 더 효과적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거룩한 낭비를 극찬하시면서도,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여인의 이름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자매 중 마리아가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성경에 이름이 없으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만약 이름을 밝혔더라면 그의 이름 앞에 Saint(성인)라는 칭호가 붙었을 것이고, 그를 기념하는 성당들이 들어섰을 것이고, 그를 향하여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찬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기념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여자의 행한 일”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 “이름 없는 종”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의 행한 일이 돋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사람에서 행함으로,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직분에서 사역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외모에서 질로, Brand name에서 quality로, 포장에서 내용으로 우리의 관심을 바꾸라는 촉구입니다.

한국의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름 뒤에 붙어 다니는 “직함”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름보다 직함을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한국의 “직함 문화(Honorific Culture)”라고 이름을 붙여 봅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해도 사장이라고 부르고, 한번 사장이면 영원히 사장이라고 불려집니다. 사람의 이름보다는 그의 직함을 부르는 것이 한국의 문화입니다. 교회에서도 한번 일년 짜리 서리집사 임명을 받더라도 영원히 집사님이라고 불리어집니다. 교회에서도 직함 문화는 뿌리를 내렸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전도사 등 교회에는 직분들이 있습니다. 이 직분들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꼭 있어야 하는 중요한 직분입니다. 그러나 한인 교인들에게는 직분에게 맡겨진 “직분” 보다 “직함”이 더 중요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제직 선출 때마다 교회는 과도한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서 주로 한인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 이유는 직함 문화 때문입니다. 영어에서는 Mr. 또는 Mrs.라고 부르면 되지 Elder 또는 Deacon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맡겨진 직분이므로 그 책임만 수행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고 그의 행한 일만 기념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으며 그를 섬긴 행위이고, 이 일을 위해 한 처녀가 그가 가진 소중한 옥합을 깨뜨렸다는 사실입니다. 섬김은 기독교 윤리의 최고봉이며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일들을 감당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만 섬김이 가장 중요합니다.

선교나 교육은 그 목표가 섬김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잘 섬기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그에게서 사랑을 공급받아 이웃을 섬깁니다. 영어에는 섬긴다는 의미의 단어 Service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와 봉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worship service) 봉사는 사람을 섬기는(human service/social service) 것입니다.

예배와 봉사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나,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의 변화된 모습을 본 세 제자들은 하나님을 만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서 세상을 향한 사명을 받게 됩니다.

예배와 봉사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며, 예배는 봉사를 촉구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 경험은 6일간의 봉사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산제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섬김은 언제 가능해집니까? 옥합이 깨어져야 향기가 나고, 그때 그 향유는 그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깨어져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옵니다. 우리도 깨어져야 사용되어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교회에도 다녔고, 봉사도 열심히 해왔는데도, 봉사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서 고민해본 사람들은 없습니까? 자신이 깨어지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진열장에만 있어서 무슨 약효가 있겠습니까? 먹어야 약효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성령의 은사를 채험하더라도, 자신이 깨어져야 쓰여지는 것입니다. 옥합은 깨어져야 향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깨뜨려서 주님 앞에 바칠 때 비로소 섬김은 열매 맺게 됩니다. 그 동안에 애지중지하며 가꾸어 온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입니까? 재물입니까? 가족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이것들은 깨어져야 주님께서 쓰실 수가 있습니다. Schweitzer박사는 신학박사요, 음악박사요, 의학박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섬기기 위해 아프리카의 이름 없는 오지에 가서 평생을 의술의 해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학문적 성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헌신과 섬김을 보고 20세기의 성자라고 부르기를 즐겨합니다. 그는 자신을 주님의 사역에 던진 자입니다.

자신의 옥합을 기꺼이 깬 신앙의 용기를 가진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흠모합니다. 자신의 옥합을 깨어 주님께 바친 그 섬김을 사람들은 흠모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날리며 유명하게 되기는 어려워도, 이름 없는 종이 되는 것은 우리들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이 우러러 보는 직함을 얻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이름 없이 섬기는 일은 우리들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죽어야 부활의 영광이 있듯이 십자가를 경험해야 새로운 삶이 있고, 깨어져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옥합을 깨뜨리므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동하게 해봅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한 주님의 칭찬과 같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웨스터체스터 연합교회 교인들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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