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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7월 14일            진정한 사랑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골로새서  1 : 1 -
14
한국에서 요즘 생각하는 아들에 관한 글을 누가 보내 주셔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합니다.

“잘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 진 아들은 내 아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나면, 아들은 큰 도둑, 며느리는 좀 도둑, 딸은 예쁜 도둑..., 착각이란?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아마도 아들을 가진 어머니들의 섭섭한 마음이 이곳에 묻어있는 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하고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사랑을 베풀며 조건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을 베풀고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사랑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랑입니다.

수 십 년간 사랑을 나누던 사이도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사건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원수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누리며 나누는 특권을 가진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은 어떤 사랑이며 어떻게 그 사랑을 자기 자신이 누리며 이웃에게 전하는 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구별된 거룩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다른 사랑을 깨닫고 누리는 삶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사랑, 즉 구별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누리고 나누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인간적인 자기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나누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사역을 하여도, 선교를 하여도, 직분을 맡았어도, 봉사를 하여도, 친교를 나누어도 결국에는 섭섭해지고, 상처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질투와 시기 혹은 분쟁과 불평과 불만이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구별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1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2절) 에바브라의 호칭도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7절)으로 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과 동역자 그리고 편지를 보내는 대상을 세상의 관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보고 있습니다. 먼저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나누는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어떠한 관계로 보느냐에 달려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룩하라고 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도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진정한 사랑을 누리고 나누기 위함입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자기 자신은 관리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와 나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할 때입니다. 자녀를 통해 부모의 뜻을 피려고 하는 곳에는 자기 자녀라고 생각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곳은 자녀의 하나님의 관리자임을 아는 부모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돕는 사랑을 자녀들에게 베풉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부모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기도하는 모습도 다르게 됩니다. 세상의 출세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여, 자녀들을 향한 주님의 뜻을 보여 주시옵소서, 알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자녀들이 의인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의 뜻이 되기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에 열심을 다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9,10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의 교우들 관계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우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볼 때에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나의 교회가 됩니다. 교우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보지 않으면 이민자의 애환을 달래며 놀며 먹고 마시는 세상의 공동체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누리고 나누는 길은 먼저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사랑을 나누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때입니다. 우리들은 인간적인 사랑과 구별하여 거룩한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나눈 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관계로 생각하고 사랑을 나누느냐에 따라 그 누림과 나눔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열매도 다르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별은 형식적인 구별이 아닌 실질적으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의 비밀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 경험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어둠의 자식, 흑암의 권세에 사로 잡혀 지내던 자임을 인정할 때에 어둠의 답답함을 알고 빛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의 한계는 어둠을 가져다줍니다. 무지는 어둠을 가져옵니다. 마음속도 알 수 없고, 바로 앞의 일도 알 수 없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쉬는 날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척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 멸망의 자식,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임을 알 때에 그런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3,14절) 용서의 은총을 받은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영생의 비밀을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영생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복음을 알고 믿는 자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믿음의 성장이 시작됩니다.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6절)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깨달을 때 진정한 소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로버트 라이튼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살아있는 한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어서도 소망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진정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4,5절) 진정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인 이유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조건적인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마다, 환경과 조건마다 달라지는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관계로 인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군림하는 교만한 사랑이 아니라 섬기는 겸손한 사랑입니다. 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랑이 아니라 용서와 관용의 사랑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도 인간의 사랑 즉 자기 힘과 의지 혹은 자기 자신의 지식으로 사랑하려 하기에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사랑으로 하는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사랑으로 하는 사랑은 무의식적으로 그 대가를 기대하는 조건을 가지게 됩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자기 자신의 실체를 너무나 잘 아는 사도 바울이 진정한 사랑을 누리며 나누는 비밀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2절) “성령 안에서”(8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용서의 은총을 품었기에 은혜를 누립니다.

그 은혜를 누리면 결국에는 은혜의 빚진 자가 되어 그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 번한 것을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구출해 줍니다. 그 사람은 구출해준 사람을 생명의 은인으로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가는 날 동안 그 사람은 구원자의 은혜의 포로가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삶 속에서 그 은혜의 빚을 갚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 보통 때와 다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보통 때는 참을 수 없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희생할 수 없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갚는 삶 속에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떠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지를 점검 하십시오.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하는 곳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분들은 진정한 사랑을 받은 복된 자임을 확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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