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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Westchester in New York,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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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7월 7일            하물며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열왕기하  5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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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생명을 가져온다고 하는데 왜 순종하지 아니할까 하는 질문을 해 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상만하고 삶 속에 적용하는 일은 머뭇머뭇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나아만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이라는 이름은 즐거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나아만 장군은 상황과 조건 속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람왕으로부터 큰 용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존귀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둥병자로 감각이 점점 없어지기에 장군으로 남아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며 이제 심해지면 격리가 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조건에서 정말로 복된 소식인 사마리아에 문둥병을 고칠 수 있는 선지자가 있다는 소식입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에게 보고하고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그러나 나아만이 엘리사를 만나러 갔지만 만나주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10절)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의 소원대로 문둥병이 치유되는 방법을 말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순종하면 되는데 나아만은 도리어 분노하며 이를 따르지 아니하려 합니다. 이곳에 사용된 분노라는 원어는 ‘뜨겁다’라는 말에 어원을 둡니다. 이것은 열을 받는다, 독이 오르다 등 아주 강한 분노를 의미합니다. 이상한 것은 분명히 치유에 대한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만 장군이 그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는 내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을 수행한 종들도 알고 있는 데 분노하며 불순종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 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영적 감각이 없거나 무딘 영적 문둥병자인 사람들, 죄로 인해 감각을 상실해진 인생이 영적 감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나아만은 분명히 인품이 있는 인격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만 치유와 구원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가장 높은 왕도 존귀하게 여기는 인격자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들려 보낼 정도로 아끼고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가장 낮은 종들도 존귀하게 생각하는 인격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작은 계집종과 수행한 종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랑스러운 주인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계집종이 주는 정보도, 종들의 권면도 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치는데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엘리사의 사자를 통한 말을 믿고 순종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최근에 필리핀에서 항만회사를 경영하면서 필리핀의 문둥병자들을 돌보는 분이 생각납니다. 소록도에 외국인 선교사님들의 돌봄을 기억하며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자기 자신이 의료와 생활개선 그리고 자녀들을 공부시켜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소원은 정상인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해 줄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광야에서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면 살 수가 있었음에도 쳐다보지 않고 죽어가는 미련한 사람들이 있었던 이유는 도저히 자기 생각으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데 믿지 않는 미련한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도저히 자기 생각으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진정한 인격은 신앙인격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고 하나님의 인격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곳에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2.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나아만장군의 모습 속에 미련한 신앙인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모습 속에도 미련한 신앙인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왕을 살펴봅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의 친서를 받고 그것을 그대로 믿지 못해 추측합니다. 아람은 이스라엘 보다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을 것도 미리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7절) 나아만 장군이 치유될 수 있도록 부탁하는 친서를 시비를 걸기 위한 것으로 여깁니다.

친서의 어느 곳에서도 시비를 거는 것이 없음에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왕의 열등의식과 불신이 가져다주는 생각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자인 것을 알면서도 추측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격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온갖 정성을 다 갖추고 왔습니다. 자기 자신은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준비하여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화려하고 위엄이 있는 행차를 합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당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직접 나오지 않고 사자를 내 보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11,12절) 나아만은 자기 생각 안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에는 엘리사가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둥병 환부 위를 손을 흔들어 고쳐야 했습니다. 그것도 더 깨끗한 강인 다메섹강 아나나와 바르발이 아니라 요단강으로 가라고 했어야 합니다.

이미 나아만은 자기 자신이 치유할 하나님의 방법을 자기 자신이 정해 놓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아만에게는 보이고 느끼는 엘리사의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도 깨끗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치유의 맡김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유하시게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때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나아만의 생각으로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의 이성과 경험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방법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통한 말씀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아만의 생각은 나아만의 교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허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물에 담그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나아만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엘리사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손해 보는 사람은 불순종한 당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분명히 치유 받아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10절) 즉 치유의 약속의 선언이 있었습니다. 이제 엘리사의 방법에 순종만 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는 것 큰 일이 아닌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은 분노하며 순종하지 아니하려 합니다. 이를 깨우쳐 준 사람은 같이 그곳에 함께 따라갔던 종들입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이 말씀은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그 중요한 것을 버립니까?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존심 때문에 정말 중요한 치료를 거부합니까?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것 같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가슴에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나아만 장군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받아드린 것입니다. 종들의 권면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게 됩니다. 결국에 유익을 본 것은 순종한 나아만입니다. 이제 군대장관을 그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고 순종한 결과에 대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읽고 있지만 무엇이 영적 문둥병에서 치유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으로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지 않는 곳에서 영적 치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만이 영혼 치유를 이루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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