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Westchester in New York,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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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6월 23일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열왕기상  19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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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에 진정한 보람과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사역의 현장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있어야 하는 곳은 사랑을 나누는 곳, 화목하게 하는 곳, 복음을 전하는 곳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기에 삶의 의미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환경과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난의 환경과 조건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믿음의 성숙을 가져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인 열왕기 상 18장에 있었던 엘리야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대승리를 거둔 엘리야는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하심을 보여주며 바알 선지자들을 섬멸한 승리를 거둔 후, 그것도 가뭄으로 힘든 땅에 비를 내리게 한 후였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의 신앙을 재건할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보니 엘리야는 도망하고 잔가지들이 많아 그늘을 이루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 엘리야는 무엇이 힘들었을까? 하나님의 사역자인 그리스도인인 우리들도 열심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애를 쓰다가 보면 좌절과 낙망의 시간이 있게 됩니다.

교회 지도자, 선교사 등 사역자들도 이러한 고비를 겪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역자들이 이러한 고난의 시간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느냐에 의해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새로운 사역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체험을 가져오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아니면 사역을 포기하고 대강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열심히 사역을 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다가 다른 고난이 다가올 때에 좌절하고 낙망하여 사역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엘리야와 같이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명을 받고 다시 회복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본문을 통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1. 자기 자신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갈멜 산에서 우상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 선지자들을 다 멸망시키고 가뭄 속에 있던 땅에 비를 내리게 하던 엘리야의 모습, 그러나 로뎀 나무 아래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정 반대입니다.

아합 왕으로부터 엘리야의 대승과 자기 자신들의 패배를 전해들은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엘리야에게 사자를 보내 통고를 한 상태에서 예전과는 달리 엘리야 선지자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패배자의 모습, 도망자의 모습, 절망하는 모습, 스스로 자학하는 모습입니다.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 엘리야는 자기 한계를 느낍니다. 엘리야는 인간의 한계, 육신의 한계, 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 자기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상대적인 생각을 하면서 서로 비교하게 만들어 갑니다. 엘리야는 자기 열조들보다 못함을 고백합니다. 이웃과 비교하고, 동역자와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것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자조하는 모습을 만듭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한다고” “이제는 지쳤어”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억울한 소리들만 하니” 이것은 악인을 질투하게 만듭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절) “열심이 특심하오니”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예배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오직 자기 자신만 남음, 그런데 자기 목숨까지도 취하려 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자기 자신은 힘든 데 세상 요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리어 잘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생각에 사로잡힐 때에 엘리야의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한계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합왕의 궁내대신 오바댜가 이미 구한 주의 선지자가 50명씩 동굴 두 군데에 피신시켜 구해 놓았음을 엘리야에게 이미 말했던 것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엘리야는 홀로 남은 자가 아니었음에도 홀로 남음을 느끼는 것이 고독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고 있음을 잊음, 동역자가 100명이나 남아 있음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수많은 남은 자들이 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18절)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에 인생은 좌절하고 낙망하며 사역의 현장을 빠져 나가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기 사역을 할 때에 결국에는 자기 한계 속에 사역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도망하여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서 자기 스스로 한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절망을 하나님께 호소하게 됩니다. “여호와께” 힘듬으로 하나님께 죽여 달라는 호소입니다. 자기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사역은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좌절과 낙망 가운데 있는 사역자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못하겠습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빨리 데려가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역자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호소하면 자살할 수 있습니다.

사역지를 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호소하지만 그 사람들이 해결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입니다. 엘리야를 도와줄 사람들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이사벨의 포학성과 그 힘이 막강한 상황입니다.

엘리야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내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좌절의 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해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자 앞에 나타나 주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가져 갈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 어루만져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천사가 로뎀나무 아래에 죽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엘리야에게 다가와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준비한 후에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역자들이 지치고 고단하여 좌절과 낙망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간구할 때에 하나님은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냅니다.

남들이 몰라준다고 해서 고독할 때에 격려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엘리야는 식물 즉 격려의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 도착합니다. 모세가 사명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을 받은 호렙산에 굴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그 징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임을 엘리야는 알게 됩니다. 이제 엘리야는 자기 자신 속에 묻혀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됩니다. 자기 자신 속에 갇혀있고 이사벨의 살해의도에 갇혀있으며 오랜 사역의 힘듬에 갇혀 하나님을 외면하였던 중심이 돌아섭니다. 헤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로운 사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후에 나오는 것은 엘리야에게 부과된 새로운 사역입니다.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 왕을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엘리사에 기름 부어 선지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합과 이사벨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것이며 이에 준비하고 엘리야도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아야 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힘든 사역도 놓을 때가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역은 세상의 가치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힘든 시간이 누구 나다 있게 됩니다. 그 힘듬을 통한 한계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짐으로 믿음의 성숙과 은혜의 누림과 경험이 있으며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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