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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4월 28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설교 :     이주섭 목사
본문 :     사도행전  13 : 16 - 23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 13:21-23) 성경에는 제가 좋아하는 표현들이 몇 개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11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히브리적 표현은, “아타 이쉬 엘로힘” (~yhil{a/ vyai hT'a;)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너 하나님의 사람아 (You are the man of God)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디모데 개인에게 듣기 좋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보기에 디모데는 영락없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저를 부르는 여러 호칭들인, 목사, 교수, 성도, 여러 말들이 있지만, 특히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호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2절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리켜 부르신 호칭입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호칭에 대한 히브리 표현을 보면 그 의미는 매우 분명합니다. ybib'l.Ki vyai yv;yI-!B, dwID"-ta, ytiac'm' 마짜티 에트 다비드, 벤 이샤이, 이쉬 케 레바비 마짜티/ 내가 만났다, 에트 다비드/ 다윗을, 벤 이샤이/ 이새의 아들, 이쉬 케 레바비/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쉬 케 레바비/ 케는 ~와 같다는 말이고, 레바비 이 말은 나의 마음과 ~ 곧 나의 마음과 같다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났는데, 그는 마치 내 마음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직역하면, I found David, son of Jesse, he is like my mind. 이 말을 우리말로 쉽게 하면, 내가 다윗을 만났는데, 다윗은 내 마음에 들어, 내 마음에 괜찮아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누구에 대해 “내 마음에 들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꽤 괜찮은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담임 목사님께서 어느 장로님을 가리켜 개인적으로 “장로님, 장로님은 내 마음에 듭니다”라고 말하신다면, 그것은 정말 좋은 칭찬입니다. 결혼 생활 25년, 30년 함께 산 아내가 어느날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에게 말하기를, “당신, 참 내 마음에 들어요. 난 참 당신 잘 만났어요” 그런 말 들을 수 있다면, 그 남편은 괜찮은 남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만나신 후에 내 마음에 든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길래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요? 성경에는 어떤 믿음의 사람에 대한 좋은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을 가리켜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1) 다양한 표현들은 있지만, 어떤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길래 사람들 마음에도 들기 어려운데,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성도라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교회에서 성도간에 교제하며, 함께 믿음의 생활을 하는데, 이웃으로부터 이런 괜찮다는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도 드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한 가지 중요한 이유에 대해 설교하려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은 어린 시절,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양떼를 돌보며 다윗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던 장소는 유대 광야입니다. 광야란 드넓은 평야를 말하지 않고, 준사막 (Semi-arid zone, wilderness, 또는 Judean desert)으로 불립니다. 다윗은 교회에서 성경공부나 VBS를 통해 하나님을 배운 것이 아니라 유대 광야에서 양을 돌보면서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다윗 시대는 지금처럼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춰진 때는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우리는 다윗보다 하나님을 알기에 훨씬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갖고 있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보다 훨씬 많은 하나님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아를 막연히 사모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알기에 부족한 때에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는가? 사실 저는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이스라엘에서 성경의 모든 사건을 그 현장에서 공부하리라 마음먹고 이스라엘로 떠난 것이 1992년 3월입니다. 이후에 저는 성경의 수많은 현장들을 찾아나섰고, 현장에서 공부할 많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 내용인 다윗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유대 광야에 대해서도 궁금했고,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도 궁금하여 어느날 베들레헴 동쪽 유대 광야를 찾아나선 적이 있습니다.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은 제가 살던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 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다윗이 양을 쳤던 유대 광야가 궁금하여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차가 더 갈 수 없는 곳에서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광야의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저 멀리 베두윈 소년들이 몇 마리의 양을 몰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는 움직이는 사물은 거의 없습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는 광야에서 저는 다윗을 생각하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다윗을 생각하며, 묵상하다가, 잠시 그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조용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10초, 20초, 이미 저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왔기에 차 소리나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제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끔 바람이 부는 정도만 느낄 뿐입니다. 그러기를 30초 정도 기다리다가 제 마음에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The Lord (Yahweh) is my shepherd, I lack nothing. 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 23편은 다윗이 어린 시절에 목동으로 광야에서 양을 돌보면서 하나님께 믿음을 노래입니다.

그 시는 다윗이 책상에 앉아 마음에 떠오르는 시상을 종이에 적은 것이 아닙니다. 양을 돌보면서, 광야, 사막에서,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고백한 노래입니다. 그 노래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분명한 믿음의 고백은 다윗을 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했던 중요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는 믿음의 고백은 자신이 곧 아버지 이새의 양 떼들에게 “선한 목자”였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양들에게 선한 목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사무엘상 17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은 어린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움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불러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사울 왕을 따라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간 세 아들의 안부를 묻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떼를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베들레헴에서 서쪽 엘라 골짜기, 전쟁터로 향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이르러 형들의 안부를 물을 때에, 날마다 싸움을 돋우는 블레셋 사람 장수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고 만약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라,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자” (17:8-10). 그러나 누구도 골리앗의 이런 말을 듣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의 말을 듣고는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17:26).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없애는 사람에게는 어떤 대우를 하겠느냐, 저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였느니라”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오게 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7:32절에 “저 사람으로 인하여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나이다.” 그러자 사울이 말하기를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지 못할 것이라 너는 소년이고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 이때에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를 가리켜 나의 목자시라고 표현한 것에 매우 중요한 고백입니다.

17:34절에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은 유대 광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에, 선한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사나운 짐승이 오면, 다윗은 양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겨 양떼를 돌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선한 목자로서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양들을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런 선한 목자로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다윗은 어느날 문득,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마치 자신이 양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겼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나를 위험으로부터 지키실 것이며, 원수의 목적에서도 상을 베푸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선한 목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다윗은 결코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란 믿음의 고백은 다윗 평생에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켜갔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사건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겼던 적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사건 이후, 더욱 하나님께 겸손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다윗은 남은 평생을 고난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궁에서 쫓겨나 피난길에 올랐을 때의 일입니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 말로 기드론 시내를 건넌 다윗과 그 따르는 사람들이 감람산 동쪽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사무엘하 16:5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니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계속 저주하며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이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며 말하기를 “피를 흘린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리라.” 아비새가 말하기를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내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이 일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냐?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나 생명을 해하려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로 다윗을 저주하라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그리고 다음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 . . 이렇게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려 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새로 시작한 비즈니스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잘 됐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극성이더니만, 네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니 하나님을 안 계시는 것 같구나, 만약 누군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비즈니스 어려운 것 외에 그 말로 인해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피난길에 올랐지만, 시므이의 저주는 다윗을 더욱 분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전, 그는 어린 시절, 광야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지켜가고 있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로 내게 선으로 갚아주실지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생을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괜찮어 내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의 다윗이라면, 괜찮지요?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좋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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