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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4월 21일            기적의 이유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사도행전  9 : 36 -
43
시카고에서 청년부를 지도하던 시절에 함께 동역을 하던 집사님들이 계셨습니다. 두 분 집사님들의 헌신으로 청년부를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집사님이 환자들의 명단을 가져옵니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 교통사고로 회생불능의 환자가 들어왔을 때에 의료진들이 함께 의견을 나눈 결과 회생불능임을 모으게 됩니다. 의사들이 포기상태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 환자 가족이 말합니다. 자기 자신들이 합심하여 기도할테니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여 치료를 시작합니다. 그

런데 결론은 그 환자가 병원을 걸어서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의학적 지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들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들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집사님은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서 청년회원들에게 각각에게 환자 한 사람 씩 이름을 써가지고 와서 기도 부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의 간증 가운데 암이 흔적이 없이 사라짐을 보고 의료진이 이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 서부지역의 순회 사역 중에 일어난 기적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룻다에서 애니아 중풍병자를 치유하고 욥바에 옵니다. 욥바에는 히브리식 이름으로는 다비다, 헬라어식 이름은 도르가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는 과부였습니다.

남편의 경제력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절이기에 남편이 존재하지 않음은 힘없고 가난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부들과 이웃들에게 선행과 구제하는 삶을 살던 사람인 다비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은 여자 사역자를 베드로가 살리는 기적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구약이나 신약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는 기적들을 많이 알려줍니다.

이러한 기적을 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이 죽었던 사람들을 살리신 대표적인 예를 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기적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수많은 기적들을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적!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기적을 보여주실까를 질문해 봅니다. 그런가하면 사역지에서도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지는 않지만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40절) 베드로는 오늘 시체로 있는 다비다를 살릴 때에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의 눈은 그 기적의 사건에 눈이 고정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통해 기적을 보여주실 때에 신비한 기적 자체에 눈이 고정되기 쉽게 됩니다.

먼저 신앙인이 기적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기적 자체에 눈이 고정되면 그저 신비하다는 생각에만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은 그저 느끼는 것에서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 얼마 안 지나서 그 사건을 잊어버리게 되거나 그 사건만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마치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언약궤가 전쟁을 승리하게 하여 주는 것으로 착각하며 우상으로 여겼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적에 사용된 하나님의 사역자에 초점이 고정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역자들을 비교하게 됩니다. 바로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에 그 사건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형들의 점심을 가져다주러 갔던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에 화가 나게 됩니다. 물맷돌 다섯 개로 무장한 거대한 장수, 그것도 그 당시에 제일 뛰어난 장군인 블레셋 골리앗을 무장하지도 않은 다윗이 이겼다는 기적과 같은 사건에 매이고 다윗에게 초점을 백성들이 맞출 때에 결국에는 사울과 비교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건과 사역자에게 초점이 맞춰질 때에 결국에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고정은 사역자를 타락하게 만들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특권의식이 생기거나 특별한 사역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기적을 자기화시키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만을 인정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랑에 빠집니다. 이럴 때에 다른 사역자들을, 기적의 도구가 되지 못한 사역자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에 항상 자기 자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지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기적과 그 기적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역자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결국에는 교만하게 됩니다. 그것이 더욱 심해지면 자신이 교주가 되어 이단이 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신앙교만입니다.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시는 기적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해를 주기 위해서,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인생과 같이 내려 오셨고, 인생의 것을 사용해서 알려 주십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들은 하나님이 사람이나 피조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저 인생들 가운데 힘이 있고 지식이 있는 인생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니 보이는 인생을 위해서 인생같이 말씀하시며 교제를 나눠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심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한계 되어 진 상대적인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초월하신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초월자이신 절대자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생에게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임을 알려주십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0절) 오늘 본문을 통하여 기적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루어지는 사건이 우연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의 능력에 맡기며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간구하는 사역자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 믿음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담대하게 죽어있는 시체 앞에서 이렇게 외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을 믿었다면 전혀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죽어 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막 5:41) 믿음의 확신은 담대한 가운데 맡기게 됩니다. 이 결과 나타난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42절) 모든 하나님의 사역자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주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위한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산 나사로, 다시 산 다비다, 다시 산 회당장의 딸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다시 죽게 될 다비다를 살렸을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다비다를 다시 살리셨을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여 주를 믿어 영원한 세계를, 영원한 삶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사역의 목적은 주를 믿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를 믿어야 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의 현장에는 그 기적이 중심이 되거나 그 기적을 위해 사용된 사역자가 중심이 되어 기적 자체가 우상화 되는 어리석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리는 것은 주를 믿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대신에 기적 자체를 믿고, 주를 믿는 대신에 기적을 이루는 데 사용된 사역자를 믿는 어리석음에 결국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은 너무나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기에 하나님은 때로는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고 이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때에 우리들이 생존하는 이 자체가 기적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나누는 비밀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사역은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자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삶의 현장에서 그 죽어 있는 영혼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영혼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외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목적이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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