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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4월 7일            평강이 있을지이다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요한복음  20 : 19 - 31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평안일 것입니다. 우리 서로 인사를 나눌까요! “샬롬!” “평강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Peace be with you!" 평강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불안한 곳에는 평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나 전 세계에 사람들이 북한으로 인하여 불안한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이 전쟁의 위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강은 자기 자신의 만족이 있는 곳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불만이 가득한 곳에는 평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족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도 모르고, 같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모르고,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도 모르는 온통 모르는 것 속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기에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몰려옵니다.

무지와 무능의 인생을 살아가려니 인생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 인생들도 마찬가지임을 곧 알게 됩니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움이 되거나 인도해 줄 수 없는 것이 한계된 피조물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언제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능력자와 지혜자의 사랑을 받을 때에 두려움이 없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부모를 믿기에 부모만 있으면 편안해 합니다. 권세자 즉 재력, 권력이 있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 평안해 합니다. 장군의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을 때에 다른 아이들 앞에서 당당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능자의 사랑을 받을 때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전능자의 사랑을 온전한 사랑 혹은 완전한 사랑이라 말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받을 때에 평안이 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요일 4:18)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려움 가운데 모인 곳에 나타나셔 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러한 온전한 사랑인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삶 속에 진정한 평안이 깃들인 삶은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본문을 통해 알아봅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은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주일은 영어로 “the Lord's day”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날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며 그 사랑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주일의 역사는 서기 321년 로마 콘스탄틴 대제가 공휴일로 선포하여 지금까지 함께 예배드리는 날로 정하면서 시작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며 부활의 주인공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드리는 날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속의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의 장면은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은 문을 닫고 두려움 가운데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방안에 모여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사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등에 의해 이미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부활을 말씀하실 때에 들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활의 소식도, 부활의 예언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소식도 예언도 믿지 않기에 자기 자신들이 예수님과 관련된 자들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떨면서 방안에 문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은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유대교인으로 자격을 박탈당함으로 공적인 권리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닫고 방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없는 고난과 조롱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어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또 부활의 소식도 듣기도 했으며, 예수님이 해주셨던 말씀도 기억하고 있기에 복잡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문이 닫혀있음에도 신비하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19,20절) 부활을 주님 스스로가 제자들에게 증거하시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임을 확인하며 두려움의 장소가 기쁨의 장소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진정한 평안은 부활의 주님과 만나는 곳에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죄를 대속해 주신 그 사랑을 믿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지 않던 도마는 믿지 못합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못합니다. 도마는 확인하고 믿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절) 그러나 확인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믿음은 확인되기 전에 그 확인되어질 사실을 미리 즐기며 평안함을 가지게 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을 때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 즉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에 평강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2,23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믿음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성령의 감동함이 없으면 믿어지지 않게 됩니다. 먼저 그 믿음까지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믿음 주시옵소서” 그 믿음은 용서의 은총에 관한 믿음이기에 주님께 간구하며 용서의 순종을 하는 곳에 실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대속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구원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용서의 은총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속함을 받는 그 믿음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대신 그 죄의 대가를 받으신 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 사랑을 믿은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순종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통하여 관계의 부활을 소망하며 용서하는 삶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리는 것을 말하며 부활의 소망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사랑을 믿는 자는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누림을 순종을 통해서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주안에서 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만 바라보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삶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과 싸우는 싸움이기에 선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소망을 누리는 삶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가지는 곳에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는 곳에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삶 자체가 전도의 사명인 사역지가 되는 곳에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복음 전파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복음 전파에 관심이 없다면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과정과 방법도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생과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 나타나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전해져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성경읽기 뒷면에 사경회 안내와 전구목사님 니카라과 진료소가 새로운 건물을 완공하고 그곳에서 진료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주섭 목사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지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경회를 이 달 26일부터 28일까지 개최합니다.

전구 선교사님도 돈 없는 사람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애를 쓰며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됩니다. 니카라과 방문 시 공사현장을 방문해서 그 어려움을 보았기에 실감이 더 납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그러나 보람과 의미가 있기에 진정한 즐거움과 평안이 그 사역 속에 있게 됩니다. 그 어렵고 힘들지만 바로 사역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그 기쁨을 누리는 곳에 진정한 평강이 찾아옵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신 이유는 바로 자족과 사랑의 기쁨을 통하여 진정한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온전한 사랑을 누리면서 온전한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믿으며, 그 용서를 이웃에게 행하며 그 용서의 사랑을 전하는 곳에 진정한 평강이 찾아옵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위해 모였습니다. 복음을 믿고 누리고 나누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샬롬, "Peace be with you!" “평강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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