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Westchester in New York, USA
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문자 설교
   †  처음으로
   †  교회안내
   †  예배안내
   †  교회약도
     환영의글
   †  교역자소개
     교회연혁
     교회행사
     교회조직
     선교활동
     주일설교
     주간소식
   †  특별집회
   †  예식안내
   †  영어예배
   †  미국장로교
 
 2013년 3월 24일            주는 나의 하나님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시편  118 : 19 - 29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한 대속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호산나! 종려나무 십자가를 들고 한번 외쳐 보실 까요?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25절)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광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 오늘 본문 25절에서도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25절) 이제 구원하소서를 호산나로 바꾸어 함께 외쳐봅니다.

“여호와여 구 하옵나니 호산나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25절) 오늘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영적 전쟁의 현장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이웃은 더 이상 믿을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유모차에 탄 젖먹이 아기를 돈을 안 준다고 머리에 총으로 쏘아 죽이는 기막힌 일들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사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사탄이 다가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유혹하며 함정과 덫을 놓고 있지만 전혀 눈치를 채지도 못하며 당하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합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온 세상에 교회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며, 신앙의 지도자들은 사방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멈추고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를 내용으로 보아 다윗이라 보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28절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자기 자신이 경험하며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입 니다. 즉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누릴 수 있는 신앙입니다.

세상의 사악함과 자기 자신이 사탄과 영적 전쟁 중임을 알고 삶의 현장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신앙입니다. “이제 구원하소서” 이러한 신앙은 어떠한 신앙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주 안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19,20절)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이성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전통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이해되는 하나님만을 믿으려 하기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는 하나님만을 믿으려 하기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편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에 자기중심적 해석을 하려 합니다. 자기 자신의 문화 안에 가두려 하니 유교적 기독교라는 말을 합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묘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과 문화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천지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자기 자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문, 의의 문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사탄이 하나님의 문 즉 의의 문에 들어가려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격 없는 것 같이 생각하여 못 들어갈 것처럼 유혹하지만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즉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용서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있는 모습 그대로 회개하며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2. 변화된 삶을 사모하는 삶입니다.
그 임재의 경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변화와 같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계심과 안 계심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시기 전에는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 사형 틀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십자가는 구원과 은혜의 십자가, 영생의 십자가로 변합니다. 십자가 자체는 그대로 이지만 그 의미가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이 변화를 말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22-24절) 건축자의 버린 돌은 그냥 굴러다니다가 버리게 되는 존재임에도 그 돌을 하나님께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면 변화된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인용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변화를 사모하는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주로 말미암은 삶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적 관점인 우리 눈에는 기이한 일이기도 합니다. 온 몸이 부자유스러운 신체장애자가 공평하신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얼굴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모습이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지” 자신의 힘, 인간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한 것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불안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림을 가질 수 있는 마음,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자기 자신이 생각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 간구하며 순종을 위한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 응답을 경험하며 더욱 더 성장하게 됩니다.

그 날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구원의 경험 즉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을 말합니다. 함께 교제를 나누시고,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가시적이며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그 날, 상황과 사건을 통해서 체험하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문 즉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대적자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24,25절) 삶의 현장에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따르며 호산나를 외치는 곳에 여호와의 정하신 날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고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는 경험을 하며 하나님과 더욱 더 가까워집니다.

3. 주님과의 관계를 귀히 여기는 삶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26,27절)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을 존귀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예배를 존귀하게 여깁니다. 헌금을 존귀하게 드리고 사용합니다. 사역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사회의 공동체보다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더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 얼마나 정성을 다했습니까? 예배를 얼마나 진실 되게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인 여러분이 가진 성경은 어떤 취급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자기 자신을 삶 자체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배로 나타납니다. 자기 자신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를 예배를 통해 살펴보는 삶입니다.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바로 매 순간마다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 간구하며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서 그 사랑을 전하려고 애쓰는 그곳에 그 날이 옵니다. 부활의 그날, 변화의 그날, 더 이상 버려진 돌이 아니라 건물의 중심이 되는 모퉁이 돌이 되었음을 아는 그날이 옵니다.

이제 인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실 수 있는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사십시오. 종려나무 십자가에 비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호산나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25절)

© 2004-2016   kpcow.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