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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3월 10일            기뻐할 수 있는 자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시편  32 : 1 -
11
오늘 우리들은 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선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가정에서, 마을에서, 일터에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 어느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신앙의 공동체는 힘을 모아 선교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유혹에, 세상의 관심에, 복음 이외의 것에 관심을 빼앗겨 잊어버리며 살아가기에 은혜를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은 신앙인이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선교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관심은 여러분들이 얼마나 구원의 기쁨 가운데 있는지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저희 교회가 어느 곳에 선교를 하는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선교를 위해 마음을 같이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일 년에 두 번 선교주일을 가지는 이유는 기도하며 협력하는 지 점검하며 결단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책갈피를 받고, 선교지 전시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교회가 함께하는 선교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선교는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진정한 기쁨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언제 즐거움이 삶에서 나타나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즐거움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곳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배반과 불신이 있는 곳에는 즐거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절망과 좌절이 있는 곳에도 즐거움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미움과 상처가 있는 곳에 즐거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큰 기쁨은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삶에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을 통한 소망과 인간으로 인한 사랑은 불완전한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통한 소망과 하나님으로 인한 사랑은 완전한 것이기에 진정한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망애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곳에 진정한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사는 이유입니다.

하 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삶은 여호와를 기뻐할 수 있는 삶에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것도 참회의 시편입니다.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던 시대에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삶을 살아가던 다윗이었습니다. 국력이 신장되고 나라가 주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영광의 왕이었던 다윗이었습니다.

겸손과 순결을 간직해온 신앙의 영웅이었던 다윗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의 시간에는 믿음을 지켰었는데,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 때에 한 장면이 보임으로 실족하게 됩니다. 즉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것이 보는 것에서 죄의 유혹은 시작됩니다.

간음죄 그것보다도 더 큰 범죄인 미필적 고의로 우리아를 살인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계산에 넣어 교묘하게 지어가는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속이는 죄악입니다. 국가에 충성하고 애국심이 충만했던 우리아를 위험한 최전방에 집어넣어 죽게 합니다. 이러한 다윗이 하나님의 나단을 통한 지적에 침상이 눈물로 썩어지도록 회개합니다.

이 회개 후 어떠한 체험을 한 다윗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 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11절)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삶,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은 어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

1.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 하리로다”(9절) 다윗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무지한 말과 노새 같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집과 완악한 모습의 사람들을 말과 노새로 표현합니다. 제 멋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고삐 빠진 망아지와 같은 삶은 길들이지 아니한 말과 노새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고삐를 매지 않은 말과 노새의 삶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삶을 알려 줍니다. 자존심이 이끌어 가는 삶으로 자존심 덩어리의 삶입니다.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 자갈과 굴레가 필요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은 법과 체면 등 여러 가지들을 사용합니다. 마음의 제어하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난의 자갈과 굴레로 다가옵니다.

자기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축복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다윗의 예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평안하고 나라가 잘 되어 갈 때에 다윗은 그만 방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에 서 있을 때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한 행동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치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치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들과 같이 자기 자신의 소유로 착각할 때에 우리아의 아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지적을 받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이 없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했다는 착각입니다.

나단이 비유로 이야기했지만 다윗은 엉뚱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부자가 자기 양은 그대로 놔두고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 비유를 하자, 다윗은 흥분하여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5,6) 사실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맹세하면서 까지 죽을 자라는 정죄의 선언입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나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은 바로 이 지적을 통하여 정직함을 다시 찾습니다. 정직한 자만이 자복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11절) 마음이 정직한 자만이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은 거짓 속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죄의 속성이 숨김이기에 자기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꾸미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과장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아는 척, 할 수 있는 척하며 살아갑니다. 핑계와 변명, 위선 때로는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5절)

2.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자복이란 히브리어 ‘오데’는 내어 던짐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 내어 던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 내어 던지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의 죄의 무거운 짐을 던지기를 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죄악 된 어리석은 인생은 이미 해결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7,8절) 오직 하나님만이 은신처, 구원해 주실 분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축복,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가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더라도 자책감에 늪에 빠지거나, 그 아픔에서 스스로 빠져 나오기 위해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하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3,4절)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자의 불행입니다. 바로 가롯 유다가 자살로 문제를 해결한 이유입니다. 3.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누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자기 자신의 죄의 짐을 내어던지는 자복하는 자만이 바로 용서의 은총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자복하는 자에게는 진노의 손길이 아니라 구원의 손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이 잡히신 후에 후회하여 돈을 들고 종교지도자들에게 갔습니다. 그들이 받지 않자 그 후회함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자살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잡히신 후에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통곡하고 예수님께 다가간 것이 다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어 갑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다윗의 참회 시이지만 이 시편은 51편과 다른 시편입니다.

오늘 시편 32편은 용서의 은총을 경험하고 이 기쁨을 전하기 위한 선교의 시편입니다. 자기 자신이 용서의 은총을 경험한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시편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경험한 그 기쁨을 전하는 선교의 찬양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근거는 회개 자체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이 자기 자신의 회개에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에 그 기쁨은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이 용서의 은총을 경험하며 드리는 간증 시편이기도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1, 2절)

이 구원의 기쁨, 사함의 기쁨, 정죄 당하지 않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기쁨을 경험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다윗과 같이 이 기쁨을 간증하며 전하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따라 하실 까요!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 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11절)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고 자복하며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에게도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용서의 은총을 누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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