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연합교회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Westchester in New York,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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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월 13일          격려하는
설교 :     이태준 목사
본문 :     히브리서  10 : 19 -
25
2013년도의 소원과 다짐이 있다면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변화는 성숙한 신앙이 되는 변화일 것입니다. 신앙의 변화는 삶의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는 언어의 생활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부정적인 언어에서 긍정적인 언어로 나타납니다. 같은 상황과 조건을 보더라도 미국 사람들이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을 많이 합니다.

배우자의 부모에게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같은 상황과 조건이라도 보는 눈과 대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진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진 무리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성도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교회는 어떠합니까? 불평과 불만이 많습니까, 아니면 격려와 칭찬이 많습니까? 비판과 정죄가 많습니까, 아니면 격려와 관용이 많습니까?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격려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별된 성도들의 특권과 의무를 이야기합니다. 특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담력을 얻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성막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대제사장이 일 년 한번 두려움 가운데 들어가던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의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성찬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기가 죽지 않고, 그 은혜로 나아감, 시은 좌 즉 은혜가 임하는 법궤 위로 나아갑니다. 지성소는 들어가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장소 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들이 은혜를 누리는 자로서 삶에 나타나야 하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의 삶은 격려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24절) 그러므로 올해 저희 교회 표어는 격려하는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러면 격려하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1. 상대방을 존중하는 삶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무시하며 살아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하며 살아갑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겸손하거나 자기 자신의 입장에 서서 교만하거나, 상대방을 격려하거나 아니면 시기와 질투를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사람들은 이웃을 무시하지 않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사람들은 이웃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격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여유 있는 삶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네가 하니 얼마나 좋으니” 영어가 잘 안될 때에 미국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데 당신은 두 개 언어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끄러워 말라고 말 합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들이 이웃을 무시하며 존중하지 않을 까? 바로 자기 자신을 잘 모를 때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체를 모를 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이상한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경험을 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을 무시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설프게 알고, 어설프게 경험한 성도들은 이상하게도 다른 성도들을 무시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제대로 아느냐, 은혜를 제대로 아느냐의 차이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는 자기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을 더욱 더 깊이 알아갈 때에 용서의 은총은 더욱 더 깊이 다가오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을 알수록 자신이 이웃을 정죄할 수 없고,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깨달아 가게 됩니다. 이웃의 모습이 자기 자신보다 낫게 여겨집니다. 자기 자신의 사역의 허점을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이웃의 사역이 더욱 더 존귀하게 보여 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교만, 자기 자신의 의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 이웃은 정죄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배운 지식에, 자기 자신이 모은 재물에, 자기 자신이 쌓아간 자리에 자기 자신이 쌓아온 명예에 도취 될 때에 상대방을 무시하게 됩니다.

따라 하실 까요? “상대방을 존중하는 삶은 내가 은혜를 누리는 삶이다” 내가 상대하는 성도는 예수님이 존귀하게 여기는 나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합니다. 2.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삶입니다. 인간은 한계 되어져 있는 피조물입니다.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알게 됩니다. 언젠가 인터넷 신문을 볼 때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라는 드라마를 어느 기자가 소개를 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드라마다운 드라마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드라마를 쓴 작가가 아무래도 기독교인 같았습니다.

성경에서 비유한 것이라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드라마 가운데 마을에 존경받는 아버지가 마을의 결혼식에서 주례사를 적어 놓은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례를 자기 자신의 삶의 고백으로 대신 하면서 신랑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나와 같이 살지 말어. 아내는 내가 이야기를 안해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 했어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안했지, 그런데 말을 안하니 모르더군. 자네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말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 사실 인간은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자녀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부모님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격려는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격려는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현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 자기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의 힘은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같이 돌을 던지는 자들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날아오는 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무지와 무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진정으로 알았더라면,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자기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롭히는,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제대로 알았다면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요, 억울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사랑의 말을 하십시오. 이것이 이웃을 격려하는 삶이며 내 자신이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3.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행동합시다. 이웃을 격려하는 것은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친절한 것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살피면서 신중하게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다중 앞에서 모욕감을 주며 이야기하는 것은 정죄가 됩니다. 그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입니다. 당사자에게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은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입니다. 그것도 당사자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 받는 사람은 상상의 나래를 펴서 더욱 큰 사건으로 변모해 나갑니다.

그래서 루머는 더욱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벌써 당사자에게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다 하지만 사랑에서 멀리 떠난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는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을 때에 당사자에게 가서 권면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아니하려는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격려의 행동으로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에게 사랑하는 말을 하며, 상대방에게 친절한 행동을 통하여 상대방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격려하는 삶, 바로 이곳에 진정한 은혜와 사랑의 누림이 있습니다.

2013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역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널리 널리 퍼져 나가도록 함께 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격려하는 삶을 삽시다. 상대방을 존중합시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말하십시다.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행동합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이것이 우리들이 올해 함께 씨름해 나가야할 표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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